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공회 (문단 편집) === 헨리 8세 이전 === AD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튼 섬을 침공하여 브리타니아 속주를 세운 이래로 브리튼 섬은 로마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로마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자연스레 브리타니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력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특히 로마가 410년 모든 군대를 철수시킨 후의 브리타니아는 로마에 의한 평화(Pax Romana)가 완전히 깨지게 되고 권력의 진공상태가 생기게 된다.[*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 '아서왕 전설'은 이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 때 게르만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브리튼섬 공략을 감행했다.[* 브리튼섬을 침공하기 전 앵글로색슨족의 [[북유럽]]에서의 상황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이 지은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 의하면 앵글로색슨족의 본격적인 침입은 449년에 시작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앵글로색슨 침입(Alglo-Saxon invasion)이라 부른다. 특히 언어학적으로는, 게르만족의 일부가 브리튼섬으로 넘어오면서 게르만어족 중 한 지류인 [[영어]]가 시작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 결과,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섬의 (현재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지역을 제외한) 중부와 남부에 자리잡게 되었고[* 이때 형성된 잉글랜드 왕국은 현재까지도 브리튼 섬의 패권을 쥐고 있다.], 켈트족은 브리타니아 섬의 변방 산악지대로 밀려나게 되면서, [[영국/역사|영국 역사]]의 주역은 켈트족에서 앵글로색슨족으로 바뀌게 된다. 597년 대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오 1세]]의 시기[* 이전의 [[교황]]과 8세기까지 후임 교황들은 세속적으론 동로마제국의 봉신이며, 황제에게 수위권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 전승에서 내려오듯 온전한 수위권 같은 것은 누리지 못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선 침략자들의 방어하고 협상하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신경 쓸 겨를이 더 없었다. [[그레고리오 1세]] 시절엔 동로마제국에서 파견한 [[라벤나 총독부|라벤나 총독]]에게도 무시당할 정도.] 로마 태생인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캔터베리의 어거스틴]]이 주교로 서품되어 잉글랜드로 건너가 당시 켄트 왕국의 왕 [[애설버트]](Æþelberht)[* 560-616년]에게 잉글랜드 군주 중에 최초로 세례를 주었다.[* 이는 잉글랜드의 기독교화라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게르만족들이 브리튼섬으로 넘어와 켈트족을 몰아낼 때 그들의 종교는 기독교가 아닌 북구 신화(北歐神話:[[북유럽 신화]](Norse mythology))였기 때문. 영국 역사학자들은 597년 [[애설버트]] 왕의 세례가 앵글로색슨족 복음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449년의 앵글로색슨 침입(Anglo-Saxon invasion) 이후 약 150년간 로마 교회의 영향력 밖에 있던 잉글랜드가 다시 로마 교회로 돌아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이 룬 문자를 버리고 로마 문자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고대 영문학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에텔버트의 왕비 베르타는 [[프랑크 왕국]] 계열의 네우스트리아 왕국[*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 시절에는 왕이 죽을 때마다 분할상속으로 영토가 나뉘었다가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합쳐지고를 반복했다. 네우스트리아는 파리와 프랑스 북부 지역이었다.]의 공주로 하리베르트 1세의 딸이며, 앞서 프랑크 왕국은 이미 대륙에서 5세기 클로비스 1세 시절 [[천주교]]로 개종했었고, 열렬한 기독교도로 알려진 브륀힐트 여왕의 조카였기 때문에[* 서고트족 출신임에도 프랑크 계통 왕국에 시집 와서 [[아리우스파]]에서 천주교로 자발적으로 개종함.] ''''''대륙에서 시집 오기 전에 이미 기독교인이었고'''''' 로마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이 켄트 지방에 안전하게 상륙하고, 포교할 수 있었다. 이를 보아 잉글랜드의 지배계층에 이미 기독교인이 상당수 세를 얻고 있었으며, 다른 지배층 또한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목적으로 개종에 거리감이 없었다는걸 보여준다. 앵글로색슨 침입(Anglo-Saxon invasion)과 에텔버트 왕의 세례 사이 시기와 잉글랜드가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를 떠나있었을 시기에도 기독교적인 문화가 사회 전반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 [[천주교]]가 [[서유럽]]에 퍼지는 과정은 이러한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각지에서 기독교화된 로마인들이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성당]]을 세우고 그곳 유력자들을 [[주교]]로 삼아 이민족 침략자에게 맞서 재산을 기부하여 보호하였고, 각지의 [[교구]]에서 서유럽 교회의 중심지인 로마에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수위권을 인정한 것이 대략적인 서유럽 교회의 성립사이다. 한편 서로마 제국은 망했어도 도시 로마는 여전히 부유했기 때문에 각지에 자금을 지원해 주면서 영향력을 키워갔고, 서로마 권역을 벗어난 동방 시리아까지 로마 교회의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2세기 [[헨리 2세]]는 교회 재산과 성직자 신분에 대한 이견으로 로마 교회와 대립하였다. 성직자의 범죄를 로마 교회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교회 법원뿐만 아니라 세속 법원에서도 재판할 수 있게 하는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던 것. 그러던 중에 왕의 기사들이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을 암살했고,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교회와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듣게 된다. 이후 일련의 사건에 대해 회개하고 교황에게 용서받는 과정 중에, 교회 재산 관리권과 같은 이권이 어느정도 국왕에게 오는 등 실질적인 권한을 차지하게 되었다. [[헨리 3세]]는 [[교황청]]으로부터 "[[십자군 전쟁]]에 쓸 군자금이 필요하니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더 걷으라"는 요청을 받는다. 로마 교회는 이런 무리한 과세 요청에 한 술 더 떠서, 잉글랜드에서 세금을 거두었음에도 만족할 만한 모금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헨리 3세에게 예비 파문을 내린다.[* 세금을 확실히 잘 걷으라는 협박의 의미가 컸었다.] 이를 고깝게 본 잉글랜드 성직자들은 오히려 국왕의 편을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근대 서유럽에서는 의외로 세속 군주가 [[교황]]에게 엿을 먹이고 해당 국가의 성직자들이 군주 편을 드는 사례가 많다. 당장 [[아비뇽 유수]]도 그런 사례라 할 수 있다. 중세는 교황이 세속 정치에 영향을 끼치던 시대이기도 하지만, 통신과 교통 수단의 미발달로 인해 의외로 [[천주교]]가 각국 주교들의 느슨한 연합체 같은 느낌으로 결합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통일된 [[미사]]경본이 나온 건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서나 가능했다. 기존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왕국의 세속 군주는 교황을 자기 아래나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교회 권력을 이용했다면,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 자체를 로마에서 분리시켰다는 점에 있다.] 14–15세기 [[백년전쟁]] 시절에는 천주교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 시절 잉글랜드 왕국은 로마 교황 쪽으로 줄을 서서[* 아비뇽 교황을 프랑스 왕의 꼭두각시로 여겼다.], 아비뇽 교황을 대놓고 무시하였으며, 대포로 위협하여 도리어 교황에게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잉글랜드 교회는 [[종교개혁]]적 예고라고 할 수 있는 [[존 위클리프]]를 이미 14세기에 배출하기도 했다. 위클리프는 그를 따르는 무리인 롤라드(Lollady)파와 함께 천주교회의 전통주의, 중세의 [[스콜라 철학]], 그리고 성인, 성유물, 성해에 대한 공경을 [[성경]]에서 서술을 찾아볼 수 없고 성서상 기독교 교리와도 충돌하는 미신으로 보아 비판하며 ''''''성경 중심의 신앙을 주장했고 이를 강조하려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고[* [[마르틴 루터]]보다 200년 앞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한 것이지만, 번역의 수준은 [[라틴어]]를 [[영어]]로 단순히 직역한 정도였다. 이로부터 2세기 후에 번역된 [[킹 제임스 성경]](KJV)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 견줄 정도로 영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것과는 대비되는 점이다.] [[성체성사]]의 성변화(화체설)[*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에선, 천주교 교회에서 교리로 주장하는 실체 변화(성변화)를 공식적으로 부인한다.], [[교황]]의 수위권 등 교회제도 등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었다.'''''' 이는 후대 [[얀 후스]]와 [[종교개혁]] 시기 [[마르틴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