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공회대학교 (문단 편집) === 성공회와 대학 === [[성공회]]는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생겨난 [[개신교]] 교회이다. 모교회인 영국 [[성공회]]가 대영제국의 세계적인 영향력과 함께 영미권 국가를 중심으로 많은 영향력을 주었다. 한국에서는 세계사 수업에서 잠깐 나오는 것 말고는 일반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교세가 미약하지만 [[성공회]]는 [[가톨릭]]과 [[정교회]]에 이어 신자가 많으며 [[성공회]]에서 설립한 유서 있는 대학들이 영미권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다. [[성공회]]의 모국 [[잉글랜드]]에서는 많은 대학들이 국교회인 [[성공회]]에서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 내에서도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와 같이 [[성공회]]에 의해 성립되어 현재도 [[성공회]]와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옥스퍼드대학은 자치권을 가진 컬리지라는 여러 개의 단위로 이루어져 있는 연합 형태의 대학이다.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대해서는 [[옥스퍼드 대학교/컬리지]]를 참조. ] 캐나다에서는 [[토론토 대학교]]를 이루는 트리니티 컬리지도 [[성공회]]가 설립한 컬리지로서 여전히 [[성공회]] 색채가 강하다. 북미에서는 미국 [[테네시]]에 소재한 [[서와니 대학교]]와 같은 유서 깊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여럿 운영하고 있다.[* 연구중심대학으로 대형화하면서 종교적 성격이 거의 사라졌지만 [[콜럼비아 대학교]]도 원래 영국 국교회에서 설립한 것이었다.] 캐나다에는 영어 사용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킹스 칼리지 대학[* [[리버럴 아츠 칼리지]]이다.]이 있다. 옆나라인 일본에서도 [[릿쿄대학]]을 비롯한 사학들을 소유하고 있다. 성공회대는 1914년 [[강화성당]]에 성 미가엘 신학원이 설치된 것이 기원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활발하게 학교를 운영했던 것은 [[감리교]]였고[*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을 운영했다. ] [[성공회]]는 사제 양성을 넘어서 중등 혹은 고등교육을 실시하지는 못했다.[* 만약에 선교 초기부터 [[성공회]]가 자금을 마련해 서울에 학교를 지었더라면 일본 도쿄도내의 [[릿쿄대학]]과 비슷한 경로로 아니 그 이상의 개신교 명문사학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1910년대에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실시했던 기독교 사학은 [[연희전문]] 말고는 없었다. ]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공회대는 [[한국 성공회]]의 성직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로서 기능했다. 신학 이외 분야의 교육 및 연구는 90년대에 들어서 뒤늦게 시작하였다.[* 이처럼 늦은 시작은 [[한국 성공회]]의 미약한 교세를 보여준다. ] 성공회대가 종합대학으로서 발전하기 시작하던 90년대는 [[노태우|군인출신 대통령]]이 역사에서 퇴장하고 [[문민정부]]가 이제 막 출범하였던 상황이고 여전히 사회전체적으로 보수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대였다. 그런 가운데 [[이재정(1944)|이재정]] 총장의 주도로 당대에 주류 대학에서는 쉽게 자리잡을 수 없었던 진보적 입장에서 발언하고 이에 해당하는 주제를 연구하는 젊은 연구자들을 교수로 채용하기 시작하면서 성공회대는 유명 진보학자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이 때문에 90년대부터 성공회대는 종합대학으로 시작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당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성공회대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재정(1944)|이재정]] 총장의 역할이 크지만 [[성공회]]라고 하는 교단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2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대한성공회]]는 사제들과 신자들이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관여하면서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이다. 한국 [[가톨릭]]도 [[대한성공회]]와 마찬가지로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참조. 이러한 두 교회의 사회참여적인 성격은 수십년간 지속된 군인 독재라고 하는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성공회]]가 가지는 사회경제적 진보성 혹은 보수성은 그 나라의 역사에 따라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 예컨대 미국에서 [[성공회]]는 진보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영국에서는 국교회로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둘째로 [[성공회]]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신앙을 국교회라고 하는 제도 속에서 포용하면서 성립하였고[* 잉글랜드는 [[종교개혁]]으로 성립한 교단이지만 성립 초기부터 온건하고 절충적인 방식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청교도]]와 같이 급진적인 개혁주의적인 그룹과 [[고교회|온건한 개혁주의]] 그룹 사이에 서로 죽고 죽이는 [[잉글랜드 내전]]을 비롯하여 갈등을 거치면서 서로 다른 신앙이 공존하는 국교회 제도가 형성되었다. 비슷한 시기 중부 유럽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독일 농민전쟁]]을 비롯해서 기존의 종교적 질서가 흔들리며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30년전쟁]]이 발발한다. ] 중용(Via Media)이라는 정신을 중시하는 교단으로서 다양한 의견을 인정하는 관용적인 성격이 있다. 이 때문에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분위기에서 쉽게 의견을 내지 못했던 진보적인 학자들을 포용할 수 있었다. [* [[신영복]] 교수도 <느티아래강의실>(한울, 2009년)이라는 산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당시 성공회대는 물론 신학교였고 신학대학이었지만 성공회 교회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다른 교단의 예를 잘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성공회 교회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나는 비교적 유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 종교에 대한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학교나 성공회 교회는 대단히 관용적이었고 그것이 나 개인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성공회대학의 교육이념을 새롭게 정립해나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보장해준 셈이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