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성균관 (문단 편집) == 개요 == || {{{#fff '''성균관의 경관, 상징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성균관_명륜당.jpg|width=100%]]}}}|| || 성균관 명륜당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Sungkyunkwanmap.jpg|width=100%]]}}}|| || 건물 배치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Sunggyungwanpicture.jpg|width=100%]]}}}|| || 대성전에서 명륜당 구역을 바라본 전경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SungkyunkwanLogomark.jpg|width=100%]]}}}||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31 ([[명륜3가]])에 위치한 조선의 국립고등교육기관이자 최고학부이다.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이 모셔진 [[유교]]의 사당인 [[문묘]]도 함께 있다. 면적은 81,673㎡. 태학(太學), [[문묘]](文廟), 반궁(泮宮)[* 제후의 나라에 설치한 대학을 가리키는 말로 물이 그 주위를 반만 둘러싸고 있다 해서이다. 참고로 천자의 나라에 설치한 대학은 물이 그 주위를 벽옥처럼 둥글게 둘러싸고 있어 영대(靈臺) 또는 벽옹(辟雍)이라 한다.] , 행단(杏壇)이라고도 한다. 1964년 11월 10일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143호로 지정[* 다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과 삼문은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 공간에 보물과 사적이 겹쳐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다.]되었으며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서울 문묘와 성균관(Seoul Confucian Shrine and Seonggyungwan National Confucian Academy)'이다. '성균관'이라는 이름에서 '성균(成均)'은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 라는 말의 각각의 앞 글자들을 따온 것으로, '인재로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고, 풍속으로써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매년 봄과 가을마다 유교의 성현들을 제사하는 석전대제가 거행됨에 따라 한국에서 유일하게 팔일무와 더불어 [[종묘제례악]]에 비견되는 [[문묘제례악]]이 정기 연주되는 장소이며, 이것은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문화대혁명#s-5]]으로 실전되었던 공묘의 제공대전을 가까스로 재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성균관은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등으로 격하되었고 1943년에는 그마저 폐교당했다. 1945년에 광복이 되면서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고[* 군정법령 제6호 참조]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했다.[* 군정법령 제15호 제1조 경성제국대학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서울대학이라 변경함 제2조 공자묘경학원의 명칭은 자에 차를 성균관이라 변경함 제3조 본령은 1945년 10월 16일 야반에 효력을 생함] 같은 해 11월 [[김창숙]]이 전국유림대회를 열어 전국에서 천여명의 대표 유림들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였으며, [[김구]]가 위원장을 [[이승만]]이 고문을 역임했다.[* 출처: 자유신문 1945년 12월 10일자 "성균관대학 재단을 촉성, 1000여 대표 참가로 전국유림대회"([[http://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npfp_1945_12_10_v0002_0190|원본]])] 이 자리에서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전국 유림들이 기부금을 모았으며 학봉 이석구가 재단법인 학린사의 거대한 토지재산을 희사하였다. 이후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로부터 [[성균관대학교|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되었고,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 초대 총장 및 성균관장으로 취임했다. 1953년에는 종합대학 [[성균관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63년 사학법 시행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121300209207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3-12-13&officeId=00020&pageNo=7&printNo=12964&publishType=00020|1963년 12월 13일 기사 라이브러리]].] 성균관대는 전통성에 눈독 들이던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재단 이사장을 맡아 대학을 지원했고, 1979~1991년에는 봉명재단이 운영했다. 이후 [[장을병]] 총장 시절 다시 삼성측에 연락을 취했고, 1996년 이건희 회장 시절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에 참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양원 민족종교협의회 회장의 말에 따르면 60년대 당시 삼성은 전통을 가진 성균관대를 탐냈다고 한다. 하루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갑 사장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찾아와서는 봉투를 하나 건넸다. 심산은 비서인 윤종([[윤봉길]] 의사의 아들)에게 ‘봉투에 뭐가 들었는지 보라’ 하더니 ‘5억원 수표가 들어 있다’고 하자 침을 뱉어 던지며, ‘이러면 내가 성균관대를 어서 가져가라고 내놓을 줄 알았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341450|#]] 이 내용이 기사화되자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와 만났는데, ‘그런 일이 정말 있었느냐’며 ‘제가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못한 일(성균관대 인수)을 해냈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2013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http://www.hani.co.kr/arti/PRINT/693080.html|#]] 이런걸 보면 삼성이 지원한 이유도 별개인 모양. 실제 [[장을병]] 총장이 삼성에 연락한 시절 삼성측은 의대가 없는 대학은 발전할 수 없다고 판단해 성균관대학교가 정부로부터 의대 설립 인가를 받으면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이에 장을병 총장이 청와대로 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이야기 끝에 대통령이 승인해 의대가 설립되고, 삼성이 재단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성균관은 유교 및 전통 문화 전문 교육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성균관은 성균관대 학생들에게는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 장소이기도 한데, 고즈넉한 학내 분위기를 조성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캠퍼스 확장에 장애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