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균관/역사 (문단 편집) == 기원 == 성균관의 기원은 중국의 상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경에 따르면 전설상의 순 임금은 설(契)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여 윤리로 일반 민중들을 교화하게 하고 기(夔)를 전악(典樂)으로 임명하여 노래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 기가 전악으로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던 교육 기관이 바로 성균이었는데,[* 주례에 따르면 "대사악(大司樂)은 성균의 법을 관장하는데, 나라의 교육 정책을 세우고 나라의 자제들을 모아서 다스린다."고 한다. 여기에 동중서는 "오제의 대학을 이름하여 성균이라 한다."고 했으니, 성균을 관장하는 주나라의 대사악을 순임금의 전악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성(成)이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고[* 맹자는 공자를 칭송하면서 "공자는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집대성이란 것은 쇠를 소리내서 옥을 울리기까지의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 고대에는 악기를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으로 구분했는데 이 가운데 하나만 연주하는 것을 소성(小成) 또는 중소성(衆小成)이라 하고 모두가 합주하는 것을 대성(大成) 또는 집대성(集大成)이라 했다. 이때 쇠로 만든 [[특종]]을 치면서 합주를 시작하고 옥으로 만든 [[특경]]을 치면서 합주를 끝냈던 것이다.] 균(均)이란 음운을 조율하는 것으로 역시 노래를 가르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고 시대의 대학에 대한 고대의 전승은 기본적으로 전설상의 이야기에 속하므로 그 역사적 실재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여기에는 아직 문자가 발달하지 못한 시점에 노래의 형식을 빌린 구전으로 공동체의 지식을 기억하고 전승해오던 역사적인 경험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맡은 전승자는 주로 시력이 차단됨으로써 비상한 청각과 기억력을 가지게 된 장님이었고, 고대 동아시아의 샤머니즘적 전통 위에서 그는 그 공동체 최고의 음악인이자 지식인인 동시에 무속인이기도 했다.[* 순임금의 아버지인 고수(瞽瞍)는 글자 그대로 장님이라는 뜻이고, 상나라의 대학이었던 고종(瞽宗)도 장님들의 으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주나라의 대학이던 벽옹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이들도 역시 장님이라는 뜻의 몽수(矇瞍)로 전하고 있다.] ||<#dcdcdc><:>[[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de_disk.jpg|width=200]]|| ||<#dcdcdc><:> 벽(璧) || 또한 전승에서 이미 민중 교화와 귀족 교육이 서로 구분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보이듯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국에서는 윤리를 가르치는 소학과 지식을 가르치는 대학이 분리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소학으로는 노인을 받드는 상(庠), 궁도를 익히는 서(序), 기강을 다잡는 교(校), 문화를 배우는 학(學)이 있었고[* 이상의 넷이 중국 상고 시대의 하나라, 주나라, 은나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전승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맹자는 "하나라에서는 교, 은나라에서는 서,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하였고, 학은 3대가 공통되었다."고 말했지만, 예기에서는 "미름(米廩)은 순 임금의 상이고, 서는 하나라의 서이고, 고종은 은나라의 학이고, 반궁은 주나라의 학이다."라고 되어있으며, 한서에서는 "하나라에서는 교, 은나라에서는 상, 주나라에서는 서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어서 그 대응이 서로 상충된다. ~~하하 개판이네.~~] 대학으로는 [[상나라]]에서 고종(瞽宗)과 [[주나라]]에서 벽옹(辟雍)이 설치되어 그 임무를 맡았다. 이로써 동아시아에는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의 교육 기관이 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주나라 시대에는 국내의 대학에 대해 남쪽은 가무를 가르치는 성균, 동쪽은 창검을 가르치는 동교(東膠), 북쪽은 작문을 가르치는 상상(上庠), 서쪽은 예절을 가르치는 고종, 중앙은 궁도를 가르치는 벽옹이라 하고 이것들을 묶어서 5학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또 혹은 벽옹이 곧 성균으로 중앙이고, 동교가 곧 동서(東序)로 왼쪽이고, 고종이 곧 우학(右學)으로 오른쪽이고, 우상(虞庠)은 나라의 서쪽에 있었다고도 한다.] 특히 주나라 시대에 천자국의 대학은 물이 그 주위를 벽옥처럼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고 해서 벽옹이라 부르거나 혹은 그 물을 영소(靈沼)라 하고 학교를 영대(靈臺)라 일컬은 데 반해, 제후국의 대학은 물이 그 주위를 반쪽만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그 물을 반수(泮水) ~~[[반수|왠지 슬픈 그 이름]]~~ 라 하고 학교를 반궁(泮宮) 또는 반궁(頖宮)이라 일컬었다. 이는 대학이 세상에서 격리된 하나의 신성한 구역을 이룬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모습은 시경에 잘 나타난다. >虡業維樅 賁鼓維鏞 / 종과 경 매다는 데 종과 경 달아놓고 >於論鼓鍾 於樂辟廱 / 아아 종과 북 울리니 아아 벽옹아 즐거워라 >於論鼓鍾 於樂辟廱 / 아아 종과 북 울리니 아아 벽옹아 즐거워라 >鼉鼓逢逢 矇瞍奏公 / 악어북 둥둥 울어 장님들 연주하네 >- 『시경』 대아 <영대> >思樂泮水 薄采其芹 / 즐거운 반수에서 그 미나리 뜯노라니 >魯侯戾止 言觀其旂 / 노후께서 이르사 그 깃발을 보리로다 >其旂茷茷 鸞聲噦噦 / 그 깃발 하고 많고 말방울 소리 딸랑딸랑 >無小無大 從公于邁 / 크고 작음 할 것 없이 공을 따라 가는도다 >- 『시경』 노송 <반수>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가 붕괴되고 [[춘추전국시대]]의 [[헬게이트]]가 도래하자 그 성분이 귀족으로 국한되는 공적인 교육 기관은 자연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공적인 교육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도 군주에게 직접 등용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관직 진출 방법으로 부상했고,[* 춘추 시대의 [[관이오|관중]], 백리해, [[손숙오]], [[오자서]], [[범려]]가 대표적인 이들이다. 전국 시대는 [[손빈]], [[상앙]], [[소진]], [[장의]], [[범수(전국시대)|범수]] 등등.] 지식인들은 종래의 신앙적인 도덕과 의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며 세상을 구제할 새로운 길을 모색해나갔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공자]]를 필두로 한 [[제자백가]]의 무수히 많은 사학들이었다. 따라서 전국 시대를 종식시키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건설한 [[진나라#s-1.2|진나라]]는 중앙에는 박사, 지방에는 삼로(三老)를 두어 학문과 교화를 전담시키고 한편으로는 [[분서갱유]]라는 문화적 폭거를 감행함으로써 사상적인 통일을 꾀했다. 여기에 뒤이어 세워진 [[한나라#s-1.2|한나라]]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보급함에 따라 국가적 교육 기관은 유교와 결합된 모습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는데, [[한무제]]는 기원전 140년에 유교를 국시로 삼고 기원전 136년에 오경박사를 설치한 데 이어서 기원전 124년에는 이를 국가적 교육 기관으로 만들어 50명의 학생으로 태학을 창립했다. 이후 지방의 호족들이 유학을 수용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태학의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한 무제의 아들인 [[소제#s-2|소제]] 때에는 100명, 손자인 [[선제(전한)|선제]] 말에는 200명, 증손인 [[원제]] 때에는 2천 명, 현손인 [[성제#s-2|성제]] 말에는 3천 명으로 불어났고 급기야 후한에 들어서서는 3만 명에 다다르게 된다. 또한 중간에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의 난세를 거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진]] 시대 태학생의 숫자는 7천에 이르러서 이들을 인위적으로 3천까지 감축해야만 했다. 서진에서는 [[구품관인법]]에 따라 지배층 안에서도 정국을 주도하던 [[문벌귀족]]들이 상류층으로 분리되어 나오는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이에 따라 278년에는 이러한 문벌 귀족의 자제들이 입학하는 상류 학교로 따로 국자학(國子學)이 세워졌다. 이후 국자학은 태학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북제]]에서는 국자시(國子寺), 북주에서는 노문학(露問學), [[수#s-4.4|수나라]]에서는 국자감(國子監)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밖에도 유학, 현학, 문학, 사학, 음양학, 의학, 율학, 산학, 서학 등 다양한 학문의 고등교육이 시도되었다. 수나라와 그 제도를 이어받은 [[당나라]]에 들어와서 국자감은 국자학 외에도 태학, 사문학, 율학, 산학, 서학의 6학을 거느리는 국가의 최고 학부로 자리 잡아 일원적인 대학으로서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하지만 [[북송]] 시대에는 국자학의 비중이 유명무실해지는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태학이 최고 학부로서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고, 이외의 학과들은 사문학, 율학, 무학, 소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원나라]]에 들어와서는 태학이 사라지고 다른 학과들은 모두 흩어져서 그 이름은 유학을 가르치는 국자감의 별칭으로만 남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