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균관/역사 (문단 편집) == [[삼국시대]] == 한국의 공식적인 고등 교육 기관은 서기 372년에 [[고구려]]의 [[소수림왕]]이 대학(大學)[* 판본에 따라서는 태학이라고 되어 있는 곳도 있으며, 국사 교과서도 이를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알고 있지만 정작 대부분의 판본은 대학이라고 되어 있다. 어차피 '태'와 '대'는 [[통가자]]이니 큰 문제는 아니다.]을 세운 것이 최초이다. 이 대학이 세워지기 직전에 화북의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서 사신을 보내어 불상과 경문을 보내온 일이 있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고구려가 대학을 세우는 데에는 전진의 조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체제 정비에 대한 강력한 소수림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7세기에는 대학박사 [[이문진]]이 고구려의 역사서 [[신집]]의 편수자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백제]]에서도 고등 교육이 박사 제도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이 박사 [[고흥]]을 얻어 처음으로 서기(書記)를 가지게 되었다는 기술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오진 덴노]]가 [[아직기]]에게 [[왕인|그대보다 더욱 뛰어난 박사]]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6세기에 들어서면 오경 박사를 비롯한 백제의 여러 박사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는데, 다만 이러한 박사들이 소속되어 있었을 국가적 고등교육기관의 전모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2012년 발견된 '진법자묘지명'에 진법자의 증조 진춘이 은솔로서 태학정(太學正)이었다는 내용이 확인되면서 존재가 증명되었다. 태학의 교수관일 가능성이 높은 오경 박사가 사료상 처음 나타나는 무령왕 대가 태학의 설치 시기로 주목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