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균관/역사 (문단 편집) == [[남북국시대]] == [[신라]]에서는 [[화랑]]제도라는 전통적인 교육, 인재 [[천거]] 방식이 있었고 초기 유교적 교육 또한 화랑제도 하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중국과 같은 체계적인 유교적 고등 교육 기관의 설치는 상당히 늦었는데, [[김춘추]]는 648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갔을 때 당나라의 국학([[국자감]])을 참관하고 도입의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당시는 [[삼국통일전쟁]]의 절정기로 제도개혁의 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미뤄졌고, 결국 통일전쟁이 완전히 끝난 682년이 되어서야 [[신문왕]]이 [[국학]](國學)을 세워서 [[사서삼경|오경]]과 그 중에서도 특히 [[논어]]와 효경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했다.[* 신라의 특성인 전통적인 [[화랑]]제 역시 계속 존속했기 때문에, 두 과정을 병행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입학 나이제한이 굉장히 널널했다. 참고대상이었던 당나라 국학의 입학연령이 14~19세로 제한됐던 반면 신라 국학의 입학연령은 30세까지였다. 입학으로부터 9년제 과정 교육기관이란 점과, 현대에 비해 빨랐던 당시의 활동연령과 평균수명까지 감안하면 굉장히 늦은 나이의 입학까지 받아들였다.] 박사와 조교가 소속되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9년 기한으로 교습을 받은 뒤 그 사이의 학업 성취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관직에 등용되었다. 또한 이밖에도 산학 박사, 천문 박사, 의학 박사, 율령 박사가 있어서 학생들에게 다양한 실무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는데 산학을 제외한 천문 이하는 저마다 교습하는 담당 기관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국학 내에서 [[과거 제도]]의 초보적 단계인 [[독서삼품과]]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편 [[발해]]에서는 당나라의 국자감을 본떠 주자감(胄子監)이 설치되었는데, 이 주자감이라는 명칭은 한편으로는 당제의 적극적인 수용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가 사용하는 국자감의 이름을 교묘하게 가져옴으로써 발해가 가진 [[외왕내제]] 체제의 일면을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