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균관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균관대는 성균관의 정신적 계승과 법률적 인계를 모두 마쳤으며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성균관은 친일적 황도유학(皇道儒學)의 산실로서 전통적인 유교의 가르침을 이어나가지 못했을 뿐더러 근대적 대학 교육 기능을 상실한 채 그 장소만을 이용당했다. 또한 상술했듯이 성균관대의 설립은 전국 유림 대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등, 일제의 명륜전문학교와는 행정상으로만 연관될 뿐 명목적/실질적으로 모두 계승하지 않았기에, 성균관대의 홈페이지에는 명륜전문학교 시절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https://www.skku.ac.kr/skku/about/s620/sub02_02.do|설명]]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고등학교기관은 과거 최고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이는 말 그대로 정통, 즉 바른 계통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의 이념을 기반으로 다스려졌다. 일국으로서의 독자성마저 희석되어 완전히 소멸될 위기에 놓였으나,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하여금 여태 명맥이나마 간신히 이어온 과거 조선왕조 시절의 풍습과 문화를 회복하여 한민족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정신이 바로 섰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명륜전문학교를, 조선왕조에 성균관을, 대한민국에 성균관대를 대입해서 생각하면 학교 측에서 어떤 말을 하려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앞선 위 문장에 이어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게재되어 있다. >그 정통의 계승은 후에 성균관대학의 설립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즉 대한민국이 조선왕조로부터 한민족 국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듯, 성균관대가 성균관으로부터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은 자명하다. 또한 옛 성균관이 성균관대 인사캠의 부지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여 성균관대가 성균관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성이 부정될 수는 없다. 성균관과 분리되어 있다고는 하나, 1963년 사립학교법이 시행된 이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과 재단법인 성균관으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옛 성균관이 성균관대의 캠퍼스 부지로부터 제외된 것일 뿐이다. 성균관과 성균관대의 역사적 연관성은 그보다 전에 이미 정립된 상태이므로 오늘날 그 관리상의 주체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써 그 역사성을 부정할 수 없다. 나아가 설사 성균관대가 설립 당시부터 옛 성균관과 전혀 다른 위치에 세워졌더라도 성균관을 계승하였음이 법률적으로 명백한 이상 성균관대의 역사성은 반박될 수 없다. 아울러 개교 당시 지방 각지의 향교들 재산과 유림의 기부금으로 근대 성균관대학이 설립된 것은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군정법령 제194호 > >제6조 향교 재단의 재산으로부터 생하는 수입은 좌의 목적 이외에는 사용함을 부득함. > >1. 성균관 급 성균관 대학의 유지 >2. 도내 각 문묘의 유지 >3. 교육 기타 교화 사업의 경영 그리하여 비록 오늘날 법적으로 캠퍼스 면적에 옛 성균관이 포함되는지의 여부는 성균관대의 정통성을 따지는 일과는 연관성이 적으나, 부연하자면 여전히 옛 성균관과 성균관대는 여러 면에서 서로 유기적 관련을 맺고 있다. 옛 성균관은 과거의, 오늘날의 [[성균관대학교/인문사회과학캠퍼스|인사캠]]은 현재의 대학 캠퍼스인 셈으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법적으로만 분리되어 있을 뿐, 지리적으로 서로 붙어 있으며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성균관대 정문의 안쪽 오른 편에 옛 성균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성균관대 국제관에서 옛 성균관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잘 정비되어 있어서 명륜당 앞마당을 거쳐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다. 성균관대 인사캠의 캠퍼스 지도에는 옛 성균관의 건물[* 대성전, 명륜당, 비천당 등]이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학교 홍보물이나 굿즈에도 명륜당의 이미지가 사용되며 인사캠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진다. 나아가 재단 분리 이후에도 성균관대와 성균관은 활발한 인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성균관대 총장이 성균관의 당연직(當然職) 이사를 맡고, 성균관장은 성균관대의 당연직 이사를 맡으면서 둘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61100209222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1-06-11&officeId=00020&pageNo=22&printNo=21500&publishType=0002|유지]]되었다. 재단 분리 이전에는 성균관장과 성균관대 총장을 한 사람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90700329202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9-07&officeId=00032&pageNo=2&printNo=11367&publishType=00020|겸임]]하였다. 이후에도 성균관장에는 성균관대 총장이나 성균관대 교수 출신이 취임하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42800289113008&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4-04-28&officeId=00028&pageNo=13&printNo=1882&publishType=00010|경우]]가 많았다. 특히 성균관의 중요 행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문화적 가치가 높은 석전(釋奠)에는 성균관대 총장이 매번 빠짐없이 참석하며 중요한 역할을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3090020920702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03-09&officeId=00020&pageNo=7&printNo=14895&publishType=00020|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성균관대 총장의 역할은 지금까지도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2798610|이어져 오고]] 있다. 성균관이 유교만 배우던 학교라 애초에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1088년에 설립되었음을 널리 인정받는 [[볼로냐 대학교]] 역시 중세에는 당시 가장 지배적인 가치관이자 패러다임이었던 [[기독교]]를 연구하며 사제를 배출하던 곳이었다. 설립 초기에는 사실상 교회법과 민법이 교육과정의 전부였다. 서양에서 교회법과 민법을 연구하며 사제를 배출했듯이 조선에서는 유학을 연구하며 유학자를 배출한 것이다. 따라서 성균관은 세계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으며, 일제와의 단절을 이유로 경성제국대학 시절을 지우고 1946년 개교를 말하는 서울대학교조차 건학년도는 법관양성소가 설립된 1895년으로 잡고 있는 등 타 대학도 건학년도에 있어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성균관대의 600년 역사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2016년 [[뉴욕 타임스|타임스]]지는 4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대학 25곳을 발표하면서 성균관대를 19위에 [[https://www.timeshighereducation.com/features/top-25-universities-over-400-years-old#survey-answer|선정]]한 바 있다. 나아가 1998년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 행사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옥스퍼드대]], [[도쿄대]] 등 세계 명문대 총장들이 참석한 것은 물론,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 등이 자리해 [[http://news.hankyung.com/article/1998092300701|축하 연설]]을 하였다. 같은 해 서울대학교 신용하 교수는 성균관대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홍보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조선일보]]에 [[http://cluster1.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vTs7&fldid=1Mfi&datanum=5&openArticle=true&docid=vTs71Mfi520041215002756|기고]]하였다. 요약하자면 성균관대는 성균관을 정신적, 대승적, 상징적인 차원에서만 계승한 것이 아니라 공식 서류를 비롯한 여러 근거들로 명백히 입증 가능한 법적 승계를 이뤘다. 또한 엄밀히 따지자면 성균관이 완전히 사라지고 성균관대가 나타나 그 역사를 이어나갔다는 세간의 인식과도 달리 조선의 성균관이 대한민국의 성균관대로 거듭난 것이다. 고로 성균관대를 조선의 성균관을 계승한 후신이라고 보기보다는, 조선의 최고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그 자체가 일제강점기와 현대 한국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