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덕대왕신종 (문단 편집) === 내용 ===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고 '에밀레'하고 울린다고 해서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성덕대왕신종에 대한 전설은 매우 유명하다. >혜공왕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종을 만들기 위한 돈을 시주받았는데, 시주하러 다니던 스님이 들른 어떤 한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 집에서는 과부 아낙이 아기와 같이 있었는데 '마음 같아서는 시주하고 싶지만 있는 건 갓난아기뿐이네요'라고 아기라도 시주받아 가겠냐는 투로 말했다.[* 다른 판본에는 정말로 미안해하는 이야기도 있다.]스님은 이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떠나 열심히 시주를 받아 종 주조에 보탰다. > >그런데 종이 도무지 완성되질 않아 점을 쳐 보니 '받아올 시주를 받아오지 않았다'라는 게 아닌가? 살펴보니 저 아기를 시주하겠다던 집밖에 안 남기에 그 아이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부분은 여러 이본이 있다. 처음부터 아이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든가, 어미가 아이 운운하며 시주를 거절함으로써 스님을 모욕했기에 부정 타서 종 완성이 안 되는 거였다든가.] 그래서 스님은 아이를 시주한다던 그 집을 찾아가 여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속에 결국 아이를 빼앗듯이 강제로 데려왔고[* 판본에 따라 여인이 결국 어쩔 수 없이 승려에게 아이를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울음을 삼키며 아이를 쇳물에 던진 뒤[* 전설에는 스님과 대장장이들이 어린 아이가 안타까워 정말 울면서 던졌다고 한다.] 종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이후 종은 어미를 그리워하는 아이의 소리처럼 에미일레라('어미의 탓이다'라고 원망한다는 해석도 있다.)하고 울렸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말실수로 인해 아이가 시주로 바쳐졌다는 이 이야기가 제일 잘 알려져 있으며 다른 내용의 전설도 존재한다. >봉덕사에서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일전(一典)이라는 이름의 종장이 이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엄청 받았고 고심에 빠져 있었다. 당시 일전에게는 과부의 몸으로 그 집에 얹혀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실덕으로 여겨서 고뇌 끝에 자신의 아이를 바쳐서 종의 제조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일전에게 이를 알린다. 일전은 처음에는 이를 망설였지만 결국 부처의 뜻으로 여겨 그 청을 받아들인다. 결국 아이는 도가니에 던져지고 종이 완성되었고, 종소리는 아이가 어미를 원망하는 '에밀레'로 들린다고 한다. (최상수, <경주의 고적전설>에서 발췌)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던 당시, 계속해서 종이 망가지자 책임자였던 대장장이는 머리를 썩혔다. 여태껏 열심히 만들었는데도 계속해서 실패만 하니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그에게는 과부 여동생이 어린 아이와 같이 살고 있었는데 오빠의 고민을 눈치채고 자신의 아이를 대신 바치겠다고 얘기했다. 여동생의 대답에 오빠는 깜짝 놀라 절대 하지 말라고 말렸고 사찰로 가서 부처님에게 조카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알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날 저녁 대장장이의 꿈에 부처가 보살들과 나타나 아이의 목숨을 살릴 방도를 알려주었다. 바로 목침을 용광로에 넣으란 것이었다. 자신들이 이적을 일으켜서 목침을 아이의 모습으로 보이게 할 것이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대장장이는 꿈에 깨서 서둘러 목침을 용광로에 넣었다. 부처의 이적으로 아이의 모습을 한 목침이었지만 그는 아이가 떨어지는 것 같아 슬피 울었다. 너무 울어서 눈이 멀 정도였지만 그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무사했고 이 아이는 훗날 명승이 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