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룡 (문단 편집) === 코믹 무술 영화로 성공 === 그러던 와중에 성룡의 커리어를 역전시킨 일이 발생한다. 1978년 당시 액션 연기뿐만 아니라 서구형의 외모에 개구장이 + 훈남 인상으로 홍콩에서 대스타였던 배우 부성(傅聲)[* [[https://hkmdb.com/db/people/view.mhtml?id=4004&display_set=big5|출처]] 안타깝게도 부성은 1983년, 29살의 나이에 영화 촬영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요절하는데, 만약 그가 계속 활동했었다면 1980년대 성룡의 위상은 지금 같지 않았으리라 평가받는다.]이 스케줄 문제로 원화평 감독의 《[[사형도수]]》(1978) 주연에서 하차하자, [[나유(배우)|나유]]가 원화평과 오사원에 대한 의리로 사원영화사에 성룡을 잠시 대여해 준 것이다. 《[[사형도수]]》(1978)가 히트하자 원화평은 곧장 《[[취권(영화)|취권]]》(1978)의 제작에 들어갔고 이 작품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성룡의 인지도는 수직상승하게 된다.[* 이 당시 영화 《취권》의 인기는 실로 대단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서울의 단성사 한 곳에서만 상영을 했는데도, 너무 많은 관객이 계속 몰려와 장기상영을 했고, 집계된 관객수는 서울에서만 약 90만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바가 있다. 1970년대에는 관객이 10만 명만 넘어도 성공이라고 했다. 이는 요즘으로 환산하면 1,500만 명 정도에 가까울 것이다. 이 기록은 이후 [[서편제(영화)|서편제]]의 전국 100만 명 동원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참고로 취권으로 뜨기 전의 성룡은 진지한 역 쪽이었다. 코믹 이미지로 성공한 다음에도 《[[화소도]]》(1990), 《중안조》(1993), 《뉴 폴리스 스토리》(2004), 《신주쿠 사건》(2009), 《더 포리너》(2017) 등 나름 꾸준하게 진지한 캐릭터와 내용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 나유와 계속 영화를 찍다가는 평생 소모품으로 살다가 끝나리란 절망감에 빠져있던 성룡은 《취권》이 성공하자 '''몰래 대한민국으로 야반도주를 하려다가'''[* Jackie Chan: My Story(1998)에서 인터뷰.] 나유의 부인 유량화에게 들키게 된다. 자초지종을 들은 유량화가 '그럼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냐?'고 성룡에게 물었고, 성룡은 이에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유는 성룡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고, 마침내 성룡의 첫 감독작인 《소권괴초》(1979)가 제작된다. 《소권괴초》에서 그는 《취권》과 마찬가지로 코믹을 가미한 액션을 내세웠고,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린다. 그러나 이때, 성룡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젊은 나이여서 그랬는지 큰 실수를 저지른다. 나유 감독과의 계약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영화사의 계약서에 서명을 해버린 것이다. 비록 몰랐다고는 해도 분명히 잘못이긴 했다. 이에 두 영화사는 성룡을 사이에 놓고 대립했고, 관련된 [[삼합회]]까지 개입하면서 일이 커진다. 이에 나유 감독은 성룡을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가버린다. 이것이 이른바 성룡 납치사건으로, 당시 홍콩의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이때 [[삼합회]]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뿐더러 홍콩의 액션배우나 무술배우들도 눈치를 보던 [[왕우]](王羽)가 개입하여 이를 해결해줬고,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성룡은 왕우가 제작하거나 관계한 영화들에 한하여 배역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미니 특공대》[* 대복성이란 제목으로 개봉하고 비디오 출시, 2001년에 SBS에서 미니 특공대란 제목으로 더빙 방영했다.], 《화소도》 등이 그 예이다. 덕분에 성룡은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하게 되고, 여기에서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 《사제출마》(1980)다. 《사제출마》는 이전까지의 홍콩 영화의 액션 연출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이전까지의 홍콩 액션은 느리면서 합을 주고 받는 약속 대련같은 액션이었지만 사제출마부터는 동작이 한층 빨라지고 진짜로 치는 것처럼 타격감이 살아있는 액션으로 바뀌게 됐다. 또한 공격하는 쪽뿐만 아니라 공격을 받는 쪽의 연출도 화려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른바 '홍콩[[스핀]]'이라 불리우는 강렬한 공격을 받아 날려간 이가 공중에서 회전하는 연출도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홍콩의 영화 흥행 기록도 경신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에 등장한 최종 보스이자 무시무시하게까지 보이는 악역이 바로 우리나라의 합기도 원로 황인식이다. 사제출마의 성공 이후 성룡은 이소룡처럼 할리우드에 진출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고, 때마침 골든하베스트사에서도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배틀 크리크》(1980)를 첫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성룡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고,[* 심지어 미국 버라이어티 지로부터 아시아의 [[듣보잡]] D급 배우라며 비웃는 기사로 매도당한 적도 있다.] 워낙에 완벽주의와 자유로운 스타일을 중시하는 그에게 할리우드의 액션 영화의 제작과정[* 홍콩식 격투액션은 테이크당 조밀한 동작구성하에 주고받는 식이다 보니 호쾌해 보이지만 그에 비해 미국식 액션은 단타로 쓰러뜨리는 등 동작구성이 초라하다보니 밋밋하고 엉성한 느낌을 주며 치고받는 것보단 어지간해선 총기를 활용한다. 배틀 크리크 이후에 촬영된 1985년작 프로텍터에서도 여지없이 이 미국식 액션 공식을 따랐기에 성룡이 권총을 쏘는 장면도 있고 그의 파트너는 적과 격투할 때는 주먹 한두 방에 처리하는 등 이질감이 든다. 성룡은 이 미국식 편집판을 싫어해서 홍콩에 돌아와서는 일부 재촬영 후 편집을 다시해 홍콩판으로 새로 내놓았다.]은 원칙에 치중하고 제약이 심해 답답한 방식이었다. 결국, 성룡의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1996년, 《홍번구》가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할리우드에도 성공적으로 재진출하였다. 버라이어티 지는 12년 전의 그 D급 배우가 이젠 A급으로 할리우드에 왔다고 보도하였다. 다만, 홍콩에서 만든 영화에서는 악동부터 열혈남아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맡았지만, 2차 할리우드 진출 작품들은 캐릭터가 '웃기는 동양인 꼰대'로 굳어버렸다. 근래 들어서 나이 탓인지 젊을 때의 그 아크로바틱함이 줄어들어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여전히 실력은 좋다.] 다만, 배틀 크리크는 미국 흥행은 실패했지만, 해외 흥행으로 제작비 3.5배 정도로 꽤 흥행했다. 첫번째 할리우드 진출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에 성룡은 1982년 개봉한 《[[용소야]]》의 감독과 주연을 맡음으로서 홍콩으로 복귀했고 이듬해 [[홍금보]] 감독의 《[[오복성]]》(1983)에 출연하면서 골든하베스트의 흥행 삼총사 [[가화삼보]]의 일원이 되어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이후 《[[프로젝트 A]]》(1984)부터는 스스로 감독과 주연을 맡아, 할리우드 체류(滯留) 시절 주변에서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며 권하기에 접했던 [[버스터 키튼]]의 영향을 받은, 과격한 아크로바틱 묘기와 좋은 유머 감각을 결합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성룡이 홍콩으로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찍은 영화는 《[[프로텍터]]》(1984)라는 작품으로, 홍콩 자본에 미국인 감독 제임스 글릭켄하우스[* 1950년 생인 제임스 글릭켄하우스는 1975년부터 영화 제작, 각본, 감독을 맡아 20년 동안 활약하던 미국 영화인으로, 집안이 엄청난 부자라서 누구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영화를 제작하던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페라리]] 광으로 유명하며, 무려 110대가 넘는 페라리, 그것도 개인 디자인으로 주문한 세계에서 1대뿐인 페라리가 수두룩하다. 2010년대에도 여전히 부자로 페라리 수집광으로서 활약 중. B급 액션물 《솔져》라든지 《엑스터미네이터》(제목만 보면 《터미네이터》 아류 같지만 완전히 다르고, 더 먼저인 1982년에 나온 영화이다. 화염방사기를 주무기로 싸우는 액션영웅을 다룬 작품으로 나중에 각본가가 글릭켄하우스가 빠진 2편을 감독했으나 쫄딱 망했다.) 같은 액션물은 흥행에 꽤 성공했고, 아들인 카메론 미셸 글릭켄하우스가 주연을 맡은 스릴러 《지옥의 슬로터》나 모험물 《타임마스터》까지 감독하고, 1995년 이후로는 영화 관련 일을 안하고 있다.]가 감독한 작품이다. 참고로 성룡은 역동적이지 못한 액션에 선정적인 장면까지 삽입된 미국 편집판을 보고 경악해서[* 국내에서도 이 미국 편집판으로 개봉했는데, 여성의 앞부분 나체가 등장하는 부분과 NG장면은 잘린 채 개봉되었다. 다행히도 1989년에 세경문화영상에서 출시된 비디오판은 성룡이 편집한 홍콩판으로 출시되었다. NG장면은 일본 개봉판 및 나중에 재편집판에서 나오고, [[유튜브]]를 찾으면 볼 수 있다.] 드라마 부분을 보강하고 성룡이 자비로 배우들을 다시불러 주요 액션 장면들을 재촬영하고, 편집한 홍콩판 버전인 위룡맹탐을 따로 만들어서 2개월 가량 먼저 개봉했다. 아니나 다를까 후에 게봉된 미국판은 악평과 함께 본고장인 미국에서까지 외면받으면 성룡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된다. 당연히 재편집판의 평이 압도적으로 좋은 편이다. 이 당시의 성룡은 경극학교 시절부터 사형제지간이었던 [[홍금보]], [[원표]]와 같은 영화에 출연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때문에 당시 이 세 명을 합쳐서 [[가화삼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이들의 영화를 그저 '세 명의 합작품'으로 도매금 취급해버리는 것은 좀 부당한 대우라고 봐야 한다. 물론,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였으니 서로가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을 수는 있지만, 1980년대 초중반 가화삼보의 전성기에도 이들 셋은 연출과 액션에 대해 추구하던 방향성이 꽤나 달랐다. 특히, 각자 자신이 주연 내지는 감독을 맡은 작품의 경우는 각자의 색이 매우 뚜렷했다. 가령 똑같이 가화삼보가 출연한 [[프로젝트 A]](성룡 감독)와 [[오복성]](홍금보 감독)을 비교해봐도 색이 굉장히 다르다는 게 눈에 띈다. 홍금보의 스턴트팀 홍가반은 개개인의 특성을 살린 다이나믹하고 현실적인 액션을 중시한 반면, 성룡의 스턴트팀 성가반은 구성원이 똘똘 뭉쳐 아크로바틱한 모션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합을 짜서,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위험한 장면을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외에도 액션의 리듬감이라든가 구성 등 작은 디테일에서도 둘은 꽤 차이가 나오는 편. [[https://www.youtube.com/watch?v=heApgG9E1fY|성룡 액션과 홍금보 액션의 차이]] 항상 과격한 스턴트와 액션을 선보였기 때문에 이제까지 수많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온몸에 부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고 몇 번은 사경을 헤메기도 했다고 한다. 《프로젝트 A》(1984)부터 성룡은 고소공포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스턴트를 했다. 게다가 작 중 이 낙하장면을 여러 번 보여주는데 매 장면마다 다르다. 즉, 높은 시계탑에서 떨어지는 걸 여러 번 반복해서 찍었다는 것이다.[* 시계탑 추락씬은 영화에서의 장면과 NG 장면까지 합쳐서 세 번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더 많이 찍었다고 한다. ] NG 장면의 추락씬을 보면 머리부터 거꾸로 추락하는 바람에 성룡이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성룡은 심각한 허리 부상을 당했으며,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성룡은 이 장면을 찍고 1년 내내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팠다고 한다. 시계탑 장면은 성룡과 성가반의 스턴트 배우인 화성과 주윤견도 참여했는데 이 둘도 성룡만큼 여러번 떨어졌다. 영화에서 사용된 장면은 주윤견과 성룡의 순서로 그리고, NG컷에서 사용된 장면은 화성이다. 이후 《[[폴리스 스토리]]》(1985) 한 편을 찍으면서 척추 골절, 무릎 부상, 고관절 탈구라는 중상을 입었으며 1986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용형호제]]》를 촬영하던 도중에는 성벽을 점프해서 건너가는 장면에서, 붙잡았던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추락, 두개골이 함몰되고 말았다. 성룡은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우측의 청력을 잃었고, 머리부분만 35바늘을 꿰매는 바람에 큰 흉터가 생겼다고 한다. 이 사고 장면은 《용형호제》의 엔딩 크레딧에서 여과없이 나온다.[* 1986년 국내 신문광고로 '성룡이 용형호제를 찍다가 몇 바늘을 꿰맸을까'라는 퀴즈를 내기도 했었다.] 부상을 치료한 후에 성룡은 영화의 나머지 부분을 촬영하여 영화를 완성시켰는데, 부상 부위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카메라 앞에 나섰다. 덕분에 영화 도입부에는 데뷔부터 고수해오던 장발을 버리고 짧게 깎은 머리를 선보였는데, 부상 이후 그 부위를 가리려다보니 영화 도입부 이후에는 다시 장발로 돌아간다. 이후 골든 하베스트의 추문회 사장은 성룡의 헤어스타일을 장발로 유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예전처럼 장발보다는 단정한 커트 스타일을 유지 중. 1994년 《홍번구》를 촬영할 때 교각에서 운행 중인 [[호버크래프트]]로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착지를 잘못하는 바람에 우측 발목이 90도로 꺾이면서 골절상을 입었다. [[깁스]] 자국을 가려야 했기에 [[운동화]] 모양을 본떠서 만든 특수 양말을 신고서 촬영을 마쳤다. 이 역시 엔딩 크레딧에서 확인 가능하다. 성룡의 작품에서는 스턴트 중의 사고, NG 등을 모아서 엔딩 크레딧에 올리는 전통이 있다.(이는 서구권에서 촬영된 영화에도 남아 있다.) 엔딩 크레딧의 NG 영상을 보면 성룡이 NG를 내면서 촬영 스태프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화기애애한 장면이 나오다가, 성룡이 스턴트를 하다가 다쳐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촬영 스태프가 다치거나 심지어는 사망자가 아닌가 싶은 사람이 실려 나가는(실제로 사망하지는 않았다.) 아찔한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성룡은 이를 통해서 '''실생활에서는 위험하니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함부로 따라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스태프 중 한명이 쓰러져 실려 나가는 장면은 영화 《폴리스 스토리4 : 간단임무》 엔딩 크레딧에서 나온다. 《용형호제》 1편 엔딩 크레딧의 경우에는 당시 성룡이 얼마나 위험한 부상을 당했는지를 보여준다.] 성룡이 와이어나 대역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 마케팅 측면에서의 과장된 수사일 뿐,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룡이 잠시 다치기라도 하면 영화 촬영 스케줄 자체가 밀려버리는데, 이는 영화사의 입장에서 엄청난 손해이며, 출연 중인 다른 배우들에게도 엄청난 피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장면에서 대역을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를 들어, 《[[비룡맹장]]》(1988) 일부 고난도 장면은, 극장에서 보던 관객이라도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식겁할 정도로 대역이라는 것이 티가 났다.[* 이때 대역은 대부분 전가락과 성가반의 화성이 맡았다. 성룡은 당시 스케줄이 바빠서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전소호의 동생이며 홍가반의 성룡 전담 스턴트맨이자 본인 역시 액션배우인 전가락은 홍금보와 성룡, 원표가 서로 두들겨 패고 싸운 다음에 등장하는 술집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다만, 이 부분은 성룡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스턴트이지만[* 문제는 그 범위가 엄청나게 넓다는 것이다.] 바쁜 스케줄 문제 때문이지 일부러 대역을 쓰는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대역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대역에게 스턴트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성가반 멤버들과 수차례 시도해서 가장 멋있게 나온 장면을 넣는다고 한다. 현재 성룡의 스턴트 팀인 성가반은 [[홍금보]]의 홍가반, 원화평의 원가반과 함께 홍콩에서 손꼽히는 스턴트 그룹이며, [[보험]]회사에서는 여전히 그를 요주의 인물로 기피하는 블랙리스트 1순위라고 한다. [[딴지일보]]에서는 그의 이러한 [[대인배]] 기질을 "내 몸이 특수효과" 정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실제로 [[기네스북]]에도 '''현재 살아있는 연기자 중 가장 스턴트 액션을 많이 한 사람(Most stunts by a living actor)'''라는 제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신종 스포츠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이 인터뷰에서 성룡의 독창적인 액션 시퀀스에 영향을 받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파쿠르에는 성룡식의 액션 스턴트 외에도 다양한 동작과 기술이 포함되어 있고, 무엇보다 파쿠르의 창시자인 세바스찬 푸캉, [[다비드 벨]] 등은 직업적으로 파쿠르를 연습하고 행하는 전문가들이니 일반인은 따라하지 않는 것이 좋다. 2012년 말에는 무려 22년만에 나온 《용형호제》 3편 격의 《차이니즈 조디악》(중국명은 십이생초)에 출연했다. 제목이 《용형호제 3》가 아닌 이유는 1, 2편의 제작판권을 가진 [[골든하베스트]] 영화사가 문을 닫았고 영화 판권이 미국 [[워너브라더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참고로 [[권상우]]가 조연으로 같이 나왔다. 이미 나이 예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라 그런지 성룡이 영화 촬영 중 무척 힘들어하는데, 이 때문에 이 영화가 사실상 성룡의 마지막 액션 코미디물이라는 말이 많았다. 이에 성룡은 스케일이 큰 '초대형' 액션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의미일 뿐, 액션 연기 자체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고 본인이 직접 해명했다. 2013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차이니즈 조디악》의 프로모션을 위해 한국을 찾아 《[[무릎팍 도사]]》와 《[[런닝맨]]》에 출연해서 아직 녹슬지 않은 그만의 재치와 인생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무릎팍도사]]》에서 [[강호동]]이 "왜 그렇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연기하느냐"고 질문하자 성룡의 답변이 예술이었다.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위험한 연기를 해야만 했었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팬들을 즐겁게 해주느냐가 관건이다."라고 한다. "물론 죽는 게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팬들이 즐거워하면 되니까 그냥 한다고" 결국 2015년 2월 22일 '''스턴트를 가장 많이 한 배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와 동시에 가장 많은 액션 영화를 제작과 동시에 주연을 담당한 기록으로 하나 더 등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