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리학 (문단 편집) == [[조선]]에서 ==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강력하게 받아들인 대표적인 나라이다. 조선 초 유학자들이 주희에 열광한 이유 중에는 [[주자(철학자)|주희]]가 [[불교]]를 집요하게 공격했다는 점이 있었다. 주희가 설파한 귀신론의 핵심 중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있으나, 다만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 원리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조화로 여긴다.'는 것이 있다. 즉 [[도교]]나 불교의 존립기반인 내세ㆍ영혼ㆍ환생 등 증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단호히 부정함을 골자로 한다. 이는 [[정도전]]의 [[불씨잡변]]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후 조선 성리학사에서 주목받는 대표적인 것은 이기론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이다. 이를테면 이기불분(理氣不分)과 이선기후(理先氣後)가 공존하는 등 주희의 성리학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면모를 두고, 이이는 이기불분을 강조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承一途說)을 주장했고, 이황은 이선기후을 강조해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안한 것이 유명하다. 이황의 이기호발설은 "사단은 이가 발하고 기가 따르는 것,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올라탄 것"으로 요약되는 한편,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은 "기가 발하면 이는 탈 뿐이며, 이가 단독으로 발하는 일은 없음"으로 정리된다.[* 유학자들은 이러한 이와 기의 관계를 각각 [[사람]]과 [[나귀]]에 대응시켜 설명하곤 했다. 조선시대 그림에 나귀를 탄 선비 그림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나귀는 그냥 두면 마구 날뛰지만, 사람이 고삐를 잡아주면 온순하게 원하는 곳으로 간다. 이황의 설명대로라면, 사람이 처음부터 나귀를 몰고 가는 것은 사단에, 나귀가 마구 달려가는데 사람이 뒤늦게 올라타는 것은 칠정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이이는 그런 구분을 굳이 할 필요 없이, 사람이 나귀에 처음부터 올라타 나귀를 몰 뿐이며, 이때 고삐를 얼마나 당기냐 늦추냐에 따라 사단과 칠정이 갈린다고 본 것이다.] 16세기에 성립된 조선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뿐만 아니라 북송의 소옹(召雍)과 장재(張載)의 성리학의 영향도 적지 않고,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의 학문[* 이이의 학설은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과 [[양명학]][*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양명학의 양지(良知)가 가질 수 있는 능동적 실천성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양명학이 갖는 문제 의식이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새로운 해석으로서 이 이론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또한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 [[강항]] 등을 통하여 조선 성리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등으로부터 시작되는 [[에도 막부]]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일본에서 성리학은 [[가마쿠라 막부]]시기에 유입되었으나, 외래 사상이 처음 들어올 때 대개 그렇듯 이해가 부족하였다.[* 불교를 처음 접한 서양 사상가 중에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처럼 불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었고, 중국인들은 불교 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인도로 유학을 갔으며, 일본인들은 유럽의 사상과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한자어를 번역어로 고안해냈다.] 17세기에 와서 조선 성리학과 교류함으로써 일본 성리학은 본격적인 발전을 맞이한 셈이다. [[경술국치]] 이후, 유림이 사회적 영향력을 많이 잃고 서구화 및 근대화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성리학도 위축되었다. 하겸진(1870-1946)은 1943년 저술하고 1970년에 출판한 《동유학안(東儒學案)》으로 조선 내 성리학 학자들과 학파의 연원을 집대성했다. 하겸진은 성리학적 이념을 의심 없이 고수하였다. 그의 노력 역시 맥이 꺼져가는 성리학을 다시 살려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 땅에서 전통적인 성리학은 하겸진과 그 제자 세대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맥이 끊겼다. 하겸진의 제자로는 대표적으로 '진주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성환혁(成煥赫)이 있다. 위당 [[정인보]]가 동생처럼 매우 아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에도 [[상투]]를 자르지 않고 유생의 옷차림 그대로 다녔으며,[* 그러면서도 용모가 워낙 청아해서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해인대학([[경남대학교]]의 전신)에서 한문 강사로 잠시 있었다. 성환혁은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한학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어했으나, 학생들의 소양 부족과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서 다음 말을 남기고 강사직을 사임했다. >아이들은 [[엿]]을 달라고 하는데 내겐 줄 것이란 [[술]]밖에 없다. 얼마 안 가 성환혁은 정인보의 납북 소식을 듣고 생의 의욕을 잃어,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시기 [[김창숙]]도 세상을 떠나면서 유림은 더 이상 단일하고 가시적인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