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석린 (문단 편집) == 자녀 == 개인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관료]]의 삶을 살았으나 직계 [[자손]]들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두 아들로 성지도(成志道)와 성발도(成發道)를 두었는데, 성지도는 [[맹인]]이었기에 후사를 잇거나 [[관직]]에 나갈 수도 없던데다가 동생인 성발도의 [[사위]]들[* 김연지, 김수지, 송석동. 김연지는 세조 대에 당상관이 되고 송석동은 사육신에게 동조했다가 함께 처형된다.]에게 [[부동산]]을 빼앗기고 모멸을 당하는 등 모진 고통을 당했다. 성발도는 [[형조판서]], [[의정부]] 참찬을 지내는 등 아버지를 따라 출세하였으나 아들 없이 성석린보다 조금 먼저 죽었다. 유전적인 요인이 있었는지 성지도의 아들 성귀수마저 맹인이었으므로 성석린이 죽고 나서도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1438년]](세종 20) 성귀수가 [[아들]]을 낳자 이야기를 듣고 딱하게 여긴 [[세종(조선)|세종]]이 부사직을 마련해 준 덕에 다행히도 [[경제]]적인 부족함은 없던 모양이다.[* [[1466년]](세조 12) 성귀수의 집 종이 [[세조(조선)|세조]]에게 [[온천]] 위치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는데 이 때 성귀수가 첨지중추부사로 소개되는 것에서 [[명예]] 부사직이 이 때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성석린은 후사가 끊어진 셈인데 뒷날 동생의 증손인 [[성삼문]]의 일가가[* 정확히는 [[연좌제]]의 범위는 친가(성씨 가문) 기준으로 성삼문의 조부의 자손들, 즉 부모형제+3·4·5촌 등이었다. 그 너머의 성씨 일가붙이들은 연좌를 당하지 않았다.] 화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