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성스차이 (문단 편집) === 신강성의 지배자 === || [[파일:신강군벌 기.svg|width=100%]] || || 신강군벌 기 || 국민혁명군 합류 후, 성스차이는 참모로 일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며 친공성향을 보였다. 허나 1930년 [[중원대전]], 이어 [[창사 폭동]]과 [[초공작전]]이 시작되면서 국민정부 내부에는 공산당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친공성향이 강한 성스차이는 군부 내부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었는데 야망이 컸던 성스차이는 [[몽골 인민 공화국]]으로 가서 몽골족으로 위장하고 몽골의 칸으로 등극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러던 중 신강성 독판 [[진수런]]의 비서 노효조가 난징을 찾아 신강성 군대를 훈련시키고 전법을 연구할 장교를 찾으면서 성스차이는 신강성으로 갈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성스차이는 마지막으로 [[장쉐량]]을 찾아가서 국민정부 강무당 교육장 자리를 자신이 맡을 수 없겠냐고 최후의 로비를 하였으나 장쉐량은 성스차이에게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고 실망한 성스차이는 신강성에 가서 1930년 가을 신강성 독판공서 참모주임에 임명되었다. 자신의 전임자 [[양쩡신]]이 피살된후 어부지리로 권자에 오른 [[진수런]]은 권력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신강성 내부에 연고가 없고 권력욕이 없어 보이는 성스차이를 신임하였다. 성스차이는 신강육군군관학교 교장을 겸하며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신강육군군관학교의 기풍을 혁신하여 젊은 장교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스차이는 생도들의 정치화 교육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1931년, 진수런의 폭정에 반발하여 투르판과 하미에서 위구르족 지도자 [[https://ko.m.wikipedia.org/wiki/호자_니야즈|호자 니야즈]]와 [[https://en.m.wikipedia.org/wiki/Yulbars_Khan|율바르스 칸]]이 반란을 일으키자 간쑤성의 회족군벌인 국민혁명군 36사단장 [[마중잉]]이 일본의 지원을 얻어 합세하여 신강성의 성도 [[디화]](현재의 [[우루무치]])로 쳐들어오자 성스차이는 동로 초비총지휘에 임명되어 마중잉 격퇴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수런의 최대 기반인 성스차이가 출격한 사이에 1933년 [[4.12 디화 정변]]이 일어나면서 진수런이 축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쿠데타군은 성스차이를 제일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성스차이에게 우루무치의 혼란이 정리되기 전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요청했으나 성스차이는 즉각 부대를 이끌고 우루무치로 돌아갔다. 쿠데타군이 추대한 신임 신강성 정부주석 유문룡은 성스차이를 신강성 임시독판에 임명하였다. 성스차이는 소련과 협상을 통해 소련의 원조를 얻어 마중잉을 완전히 격퇴하였고 1934년 6월 27일, 2차 정변을 일으켜서 쿠데타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신강성의 지배자로 등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