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스차이 (문단 편집) === 몰락 === [[독소전쟁]]의 발발 후 소련이 수세에 몰리자, 성스차이는 1942년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을 일으켜 [[마오쩌민]]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장제스에게 붙었다. 미국이 국민정부를 지지하자 소련은 신강성에서 군대와 고문단을 철수시켰다. 성스차이는 성공적으로 신강성에서 자신이 1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디까지나 국민정부의 목적은 신강성의 주권을 중앙에 귀속시키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성스차이는 어디까지나 잠시 써먹는 도구에 불과했다. 신강성에 미국 영사관이 설치되고 중앙군이 진주하는 등 국민정부의 입김이 세지자 1943년 10월, 충칭의 국민당 5기 11중전회에 참석했던 성스차이는 격렬히 반발했다. 게다가 국민정부는 항일전쟁으로 인하여 극도의 궁핍에 시달리고 있어서 성스차이에게 소련처럼 대량의 원조를 제공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파일:성세재일가.jpg|width=100%]]|| || 1943년의 성스차이 일가 ||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와 [[바그라티온 작전]]의 성공으로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이자 성스차이는 다시 소련에 붙기 위해 소련 측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소련 측은 한번 자신들을 배신했다가 다시 꼬리를 치는 성스차이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표출하였고, 주중 소련대사 판유스킨은 장제스를 접견하여 소련은 성스차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의사를 전달했다. 1944년 8월 29일, 장제스는 성스차이를 신강성 독판에서 해임하고 농림부장에 임명하였다. 멀리 떨어진 그를 영지에서 끌어 내리고 중앙정부로 불러들임으로서 자신의 통제 하에 두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미 국민정부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던 성스차이는 1944년 9월 11일 농림부장에 취임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충칭으로 이동했고 다시는 신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로써 11년간 유지되었던 성스차이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중일전쟁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30일까지 농림부장으로 있다가 곡정강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해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