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유물 (문단 편집) === 성유물과 관련된 이야기 ===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헬레나]]가 열성적으로 성유물을 수집했던 것이 전통으로 이어진 덕분에[* 물론 이 말이 성유물 경외가 헬레나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 앞서 2세기 경 교부인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순교자들의 유해를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모아야 하며, 이들은 갈고 닦은 금보다 값지다"고 하였다.] 어지간한 성유물들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중하게 보관되었으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약탈되어 서유럽 각국으로 흩어졌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바우돌리노]]〉에서는 성유물이 어떻게 약탈되어서 어떻게 분배됐는지까지 알 수 있다. 참고로 주인공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은 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가짜 성유물을 만든 뒤 팔아서 한 몫 챙겼다. 유명한 성유물로는 성녀 [[베로니카(성인)|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은 천 조각,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롱기누스의 창]], 예수를 못 박는데 사용했다는 [[성정]](聖釘), 예수의 수의로 알려진 [[토리노의 수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흘렸다는 피, 즉 성혈(聖血) 등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썼다는 [[성배]]도 당연히 성유물이다. 예수가 머리에 썼다는 가시관의 가시 조각, 예수가 태어났을 때 담았다는 말 구유의 조각 등등 별 게 다 있다. 물론 이 유물들의 진위는 알 길이 없다. [[성모 마리아]]에 관계된 성유물이 유명하고, [[12사도]]들에 관계된 성유물도 권위가 높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의 유골을 가져와서 모셨는데, [[이슬람교]]를 믿던 당시 이집트 왕조에 들키지 않으려고 이슬람 교도들이 싫어하는 [[돼지고기]] 안에 숨겨서 가져왔다. 복음사가들 중 한 명인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모셨기 때문에 베네치아 교회는 상당히 높은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베네치아의 상징은 성 마르코의 사자로 지정되어 국기에도 새겨졌다. 한편 십자군 이전에는 9세기 [[에스파냐]] [[갈리시아]] 지방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 [[대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성 야고보를 [[레콩키스타]]의 정신적 지주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으로 만들었고, 그의 유해가 모셔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지방으로 향하는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순례길]]은 중세부터 현대까지 명맥을 이어 온다. 그 외에 여러 [[성인]]의 [[유해]]나 소유품도 성유물로 통한다. 너무 귀하게 여겨지는 나머지 죽자마자[* 교파별로 다르긴 하지만 검증 절차 혹은 의결 과정을 거쳐 시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은 직후에는 성인일 수가 없다. 생전 덕망이 높아 곧 성인이 되리라 믿는 때 그렇게 되는 것.] 시체를 토막내서 솥에 넣고 팔팔 끓여서 뼈만 발라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유명한 성인의 유해가 있다고 알려지면 순례객들이 몰려오느라 마을의 경제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몇몇 성인의 유해는 방부 처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부패하지 않고 보존된 경우가 있다.[* 일반 미라처럼 바짝 마른 시체가 된 유해도 있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처럼 수백 년이 지났어도 살점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유해들이 정말로 방부처리 없이 부패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은 지 오래된 데다가 성당에서 성인 유해를 조사하라고 넘겨주지는 않으니... 일각에서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된 지하 경당들이 빛이 들어오지 않고 온도, 습도가 낮게 유지되고, 외부와 공기도 어느 정도 차단되어 부패하기 어려운 환경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직감하자 고향 아시시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죽어가는 몸으로 아시시까지 가는 동안 아시시에서 호위병을 보내왔다. 외지에서 죽으면 해당 마을에서 "이젠 우리 마을 성인이심."하고 차지할까 봐 그랬다고 한다. 아시시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나자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성당]]을 세우고, 성당 부지에 비밀스럽게 땅을 깊숙히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입구를 봉쇄하여 아예 도굴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너무 잘 숨긴 나머지 몇 백 년간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정확히 성당 어느 지점에 있는지 잊혔다가 20세기에나 다시 알려졌을 정도. 또한 유명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상을 떠난 이후 말 그대로 시체가 갈가리 찢기는 일을 겪었다... 라고 하지만 정작 실제로는 [[툴루즈]]에 그의 무덤이 있다.[[http://thecatholictravelguide.com/destinations/france/toulouse-france-tomb-saint-thomas-aquinas/|#]] 이외에도 [[제네바]]의 주교였던 [[프랑수아 드 살]]은 [[리옹]]에서 세상을 떠나자 평소에 그를 공경하던 해당 지역 주민들이 그의 유해와 입고 있던 옷들을 모두 조각내 서로 가져갔다.[* 꼭 성인이 아니더라도, 영국 왕 [[헨리 2세]]의 차남이자 살아있을 때 공동 왕으로 즉위했던 [[청년왕 헨리]]의 경우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루앙]]에 묻어달라고 했으나 운구되던 중에 [[르망]]의 주민들에게 탈취당해서, 분노한 루앙 주민들이 르망에 몰려오기도 했다.] 죽은 성인뿐만 아니라 살아서 이미 성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도 고생이 많았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달라고 사정하는 사람이 매일같이 개미처럼 달라붙으면 곤욕일 수밖에… 대표적인 예로 사제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가 있는데, 성인이 [[병자성사]]를 주러 갔다오는 길에 머리카락을 뽑아가거나 가위나 이빨(!) 등으로 옷을 찢어 갔다고. 또한 성인은 아니었지만 당대에는 성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던, [[십자군 전쟁]] 시절의 [[은자 피에르]]의 경우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나귀의 털마저도 성유물'''이라는 말이 돌았다. 성유물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 성유물을 둘러싼 이권과 싸움 등에 대해서는 패트릭 J. 기어리가 지은 ≪거룩한 도둑질≫이라는 책을 참고해도 좋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