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종(원) (문단 편집) == 기타 == [[제국대장공주]]의 원나라 내에서의 공주 책봉 문제를 가지고 [[충렬왕]], 원성공주(元城公主)와 다툼이 있었다. 결혼 당시만 하더라도 제국대장공주는 그냥 공주 또는 크툴룩켈미쉬로만 표기될 뿐 고려에서 충렬왕이 독자적으로 공주의 거처 원성전(元城殿)에서 따온 원성공주로 책봉하기 전까지 정식 봉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주와 같은 예우를 받기는 했다.[* 원래 몽골의 [[황금씨족]]은 칸의 딸일 경우, 원칙적으로 몽골인과만 혼인했지만, [[제국대장공주]]는 늦둥이 막내딸이면서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속국이자 타국에 시집을 갔다. 고려 원종이 [[쿠빌라이 칸]]의 즉위 명분과 내전 승리를 도운 보답이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제국대장공주가 보내진 것에는 이런 애매한 입지도 있었을 것이다.] 성종은 이를 꺼렸으나 결국 세월이 지나 안평공주(安平公主)로 책봉했고, 황제가 바뀌면서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이라는 이유로 제국대장공주로 높여지게 된다. [[칭김]]이 카안의 자리에 올랐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쿠빌라이 칸]]이 장수하면서 먼저 사망했고, 이로 인하여 쿠빌라이의 후계자는 손자 테무르가 되어야 했다. 당시 몽골의 카안 계승은 우리의 적장자 승계와 비슷하게 모계의 위치도 중요하게 여겼는데, 시어머니가 같은 부족 출신의 며느리에게 자신이 관리하는 재산을 계승시키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의 며느리들은 옹기라트(콩기라트 또는 곤기라트)부 출신이 아니었기에 [[보르테 우진]] 카툰의 재산을 계승받지 못했는데, 쿠빌라이 칸의 생모 케레이트 소르칵타니 베키가 옹기라트부 출신 여자들을 며느리로 들여서 쿠빌라이 칸의 황후 차브이가 재산을 계승받았고, 차브이가 사망하자 이를 같은 옹기라트부 출신인 [[칭김]]의 황태자비 코코진이 물려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종 테무르 칸의 황후 불루간은 옹기라트부 출신이 아닌 위구르계 바야우트부였기 때문에 이를 물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자 몽골 제국의 지배자라는 대칸(카안)의 위치가 매우 불안정해졌다. 당장에 칭김의 아들 중 셋째인 테무르였기에 친형 카말라도 있었고(둘째형은 요절), 친조카들도, 숙부들도 있어서 여기저기에 황위 계승권자들이 넘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고려]]라는 1개의 국가를 가진 고종사촌 형제인 [[충선왕]]의 존재'''는 또 다른 위협이었다. 훗날 충선왕은 쿠릴타이에 참석해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원 [[무종(원)|무종]] 카이산과 원 [[인종(원)|인종]] 아유르바르바다의 즉위를 도왔다. 따라서 성종 테무르 칸은 고모인 [[제국대장공주]]의 위치를 격하시켜 충선왕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협을 미연에 제거하고자 했다. 아마도 제국대장공주의 모계 혈통이 옹기라트부 출신이 아니었기에, 칭기즈 칸의 자녀들 중에서 [[보르테 우진]]의 소생 자녀들에게 주던 특별한 우위권이 없음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 황실의 [[부마]]로서 입지 강화를 꾀하던 [[충렬왕]]과 [[원나라]] 내에서 입지를 인정받고자 하는 원성공주는 몇 번이고 대도로까지 찾아가 끈질기게 요청했고, 결국 안평공주에 책봉되는 것으로 충렬왕과 원성공주가 이 다툼에서 승리하게 된다. 실제로 원성공주는 안평공주로 책봉된 이후 남편 및 아들인 태자([[충선왕]])와 함께 원나라로 갔을 때 [[쿠빌라이 칸]]의 딸이라는 이유로 곁에 아무도 앉지 않을 정도로 서열이 높아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