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종(조선) (문단 편집) == 기타 == * 정사(政事)에 있어서는 조선왕조 역대 국왕들 중에서 [[성군]]이자 현자로 불리울 정도로 긍정적 평가를 받으나, 정작 가족 및 여자 관계나 자식농사 같은 사생활 면에서는 다소 부실한 면이 있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특히 장남이자 폐비 윤씨의 소생인 10대 왕 [[연산군]]은 생모에 대한 과한 집착으로 인해 관료들을 살육하고 민생고를 가증시킨 끝에 조선 최초로 반정으로 축출된 왕이 되었고, 중전 윤씨의 소생이자 차남인 11대 왕 [[중종(조선)|중종]]은 이복형 연산군의 뒤를 이어서 왕으로 올랐지만, [[조광조]]에 대한 지나친 불신으로 인해서 사약을 내린 점 때문에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평가를 받아왔다. 특히 폐비 윤씨가 후궁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고, 비빈(妃嬪)들의 갈등과 신경전에도 그리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으며, 또한 세자 시절 연산군을 증오하는 어머니 [[인수대비]] 한씨의 연산군 견제에도 그리 적극적이지는 않았고 자신이 승하한지 100년이 지나도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연산군이 평생 알지 못하도록 유훈(遺訓)을 내렸지만 결국 생모를 그리워하는 연산군에 의해서 유훈은 깨지고 연산군에 들어서 [[무오사화]]와 폐비 사약을 지지한 관료들과 인수대비를 지지하였던 관료들이 다수 참수되고 인수대비도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손자 연산군에게 막말을 듣는 등 말년에 험한 꼴을 당했다. *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전하께서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묻자 성종이 "나보다 더 큰 사람도 있소."라며 당시 조정 대신 중 장신 축에 들었던 [[허종(조선)|허종]]이라는 신하를 불러 비교해 보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기록에는 허종이 기골이 장대하다라는 표현만 있고 구체적인 키는 묘사되지 않는데 조선 후기 인물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11척 2촌(十一尺二寸)으로 나온다. 당시 척으로 환산해도 2m가 족히 넘는다. 현재도 농구선수로 입신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딱 좋을 법한 상당히 큰 키인데, 평균 키가 더 작은 당시 [[조선]]의 기준으로는 아마 [[거인]] 수준이었을 것이다. 성종은 허종 다음 자신이 제일 컸다고 하였는데, 이를 볼 때 구체적으로 성종이 정확히 몇 척인지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성종도 상당한 장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조선의 역대 임금들 중 [[태조(조선)|이성계]]와 더불어 키가 가장 컸다고 한다.[* 성종의 피를 이어 받은 아들들인 [[연산군]]과 [[중종(조선)|중종]]도 [[장신]]이었다.][* 이성계 또한 180cm의 장신으로 키가 정확하게 기록된 조선의 역대 국왕들 중 최장신이었던 사람이다.] 또한 성종의 부친 [[의경세자|덕종]] 역시 기골이 장대했다고 하며, 모친 [[인수대비]] 역시 미녀에 당시 여성으로서는 키가 큰 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키가 컸으니 아들 성종도 장신이 유전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친형 [[월산대군]]도 키가 컸다고 전해지며, 또한 [[인수대비]]의 얼굴을 닮아 미남이었다고 한다. 키는 성종과 월산대군 형제 둘 다 컸으며, 인수대비의 얼굴과 덕종(의경세자)의 성격은 월산대군이 닮고, 인수대비의 성격과 덕종의 얼굴은 성종이 닮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누나 [[명숙공주]]의 외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사실은 없으며, 위의 그림은 성종의 실제 [[어진]]이 아닌 우승우 화백의 상상도다. * 성종은 풍류를 즐기고 예술적인 기질이 다분했던 인물이였다.[* 만약 군주가 되지 않았더라면 친형 [[월산대군]]이나 작은할아버지 [[안평대군]]처럼 예술인으로 명성을 떨쳤을 듯 하다.] 그는 [[술]]을 매우 좋아해서 종친들을 접견하거나 왕실의 웃어른들인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 [[소혜왕후|인수대비]], [[안순왕후|인혜대비]]와 친형인 [[월산대군]]을 위해 잔치를 자주 열었다. 성종은 학문을 좋아했고 [[책벌레#s-2|독서를 즐겨 하며]] 특히 해서에 정통하여 글씨체가 사랑스럽고 단아했으며 무게 있었고 명필이였던 안평대군에 버금 갔다고 한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고 조선시대에 그림 그리는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청인 도화서에 애정을 가지고 능력 있는 화원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난을 치거나 그림도 그렸다고 하지만 오늘날까지 알려진 작품은 딱히 없다. 대간들은 성종의 취미 생활이나 사생활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며 하지 말라고 반대하는데 [[궁궐]]에서 애완 동물에게 옷 하나 입혀서 키우려 해도 반대, 매사냥도 하지 말라고 반대, 활쏘기도 공식적인 행사 아니면 하지 말라고 반대해 왕이였지만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처지였다. 그나마 허용된게 술을 마신다거나 밤마다 [[후궁]] 처소로 가서 씨를 뿌려 왕실을 번성하는 것은 권장되는 일이라 대간들이 태클을 걸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38세의 나이에 16남 12녀[* 일찍 요절하여 작호를 받지 못한 자녀와 최종 가계에서 누락된 숙신옹주를 합하면 19남 15녀이다.]라는 어마어마한 자식들을 두어 왕실을 번성시키지만 건강을 해쳐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 시를 매우 좋아했는데, 시를 잘 짓거나 문장을 잘하는 신하와 종친들을 총애했다. 성종은 할머니인 자성대왕대비, 장인인 [[한명회]], 친형인 월산대군을 위해 시를 친히 짓기도 하였는데 대간들은 군주가 시를 짓는 것은 체통에 맞지 않다고 반대를 해대는 바람에 한명회에게 내린 시를 거둬들이고 공식적으로 시를 짓거나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주지 않고 오직 친형인 월산대군에게만 시와 문장인 서를 지어주고 월산대군과 서로 수창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이는 월산대군도 시를 좋아하고 잘 지으며 피를 나눈 하나뿐인 형제 사이라 친했고 형과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시와 편지들은 대간들이 알 수가 없으니 자유롭게 시를 지을 수 있었다. 역대 조선 국왕들의 시와 서를 모아 책으로 발행한 <열성어제>에 따르면 성종이 지은 시와 서가 상당수 있으며 친형 월산대군과 주고 받은 시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1488년 월산대군이 병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형을 잃은 슬픔에 한동안 시를 짓지 않았다가 몇 년 후 유호인이라는 문신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 알려진 시는 1편 뿐이다. 사실 임금이 신하를 위해 시를 지어주는 것은 드문 일이였고 대간들이 반대하는 행동이어서 성종은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서 바치라고 명해 시를 감상만 할 뿐 월산대군이 죽은 이후에는 별다른 시문을 남기지 않았다. 성종이 지은 시에는 월산대군과 형제간의 정을 읊은 것들이 많고 임금의 특성상 지방의 야외보다는 궁궐 안 생활과 관련된 구절이 많은 편이다. 끝으로 성종이 지은 시 2수만 소개한다. >妙年得慶良可驚 >묘년에 경사 얻어 진실로 놀랐는데 >微兄誰識弟深情 >형이 아니면 아우의 깊은 정을 누가 알랴 >聯茵相對竢有日 >자리 깔고 마주할 날이 오길 기다리고 >談笑自應肝膽傾 >담소하며 마땅히 속마음을 터놓으리라 >---- ><친형 월산대군을 위해 지은 시> >椒殿祥凝福自宜 >초전에 상서 어려 복이 절로 알맞고 >陽來覆載亦如私 >천지에 양기 옴도 사사로운 은혜 같네 >蟠桃閬苑三千歲 >낭원의 반도는 삼천 년에 열리고 >古栢人間一百圍 >세상의 잣나무는 백 아름이나 되네 >今日來開王母宴 >오늘에 대왕대비 잔치를 개최하니 >一心猶勝老萊嬉 >마음은 노래자의 기쁨보다 낫구나 >壽觴縱醉恩何盡 >축수 술에 취해도 은혜 어찌 다하랴 >晨夕長知奉罔違 >아침저녁 오래도록 어김없이 받들리라 >---- ><할머니 자성대왕대비를 위해 지은 시> *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고려]]의 [[성종(고려)|성종]]과도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다.[* 사실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원래 묘호는 군주 사후에 그의 업적을 기려서 지어올리는 이름이므로 묘호가 같다는 것은 군주에 대한 평가에 유사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선 아버지가 군주가 아니었으며 위에 형을 둔 상태로 [[왕위]]에 올랐고 사후에 받은 [[묘호]]도 둘 다 성종(成宗)으로 똑같았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공통점도 있으며,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38세로 같은데, 심지어 사후에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도 같았다.[* [[고려]]에선 모친 [[천추태후]]와 그녀의 최측근 [[김치양]], 조선에선 아들 [[연산군]]에 의해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다만 고려는 [[현종(고려)|현종]] 이후 다시 부활의 길을 걸으면서 100년 동안 태평성대를 유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조선은 연산군 이후에도 한동안 침체기와 암흑기를 전전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가리켜 신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조선 성종은 [[조선]]을 건국하는데 1등 공신인 [[신진사대부]]들에게 족쇄를 채우던 제도들을 숱하게 남긴데 반해 고려 성종은 [[장원(농업)|장원]]이라는 대토지제인 [[공음전]]을 가속화시켰고 [[부곡|부곡민 체제]]를 허물지 않으면서 역으로 [[노비환천법]]을 실행에 옮기며 [[문벌귀족]], [[고려/호족|호족]] 등 기득권 지배층에게 오히려 힘을 실어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고려 성종은 숙부 [[광종(고려)|광종]]이 없앤 장원을 도로 [[부활]]시킨데 반해 조선 성종은 공음전보다 더 [[개혁]]적인 [[과전법]]을 거쳐 직전법을 시행하여 장원을 아예 없앴다는 점에서도 서로 차이가 있다.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성종(조선)|성종]] 32권, 4년( 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일본국 인백단 삼주 태수 원교풍이 양영서당을 보내어 선물과 글을 올리다 일본국(日本國) 인백단 삼주 태수(因伯丹三州太守) 산명전(山名殿) 소필(少弼) 원교풍(源敎?)이 양영 서당(亮瑛西堂)을 보내어 와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아울러 사서(四書) 각각 1건(件)씩을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는 이르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皇帝陛下)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천운(天運)을 이어받으시니, 구방(舊邦)이 유신(維新)하며, 덕(德)이 하(夏)나라·은(殷)나라의 초정(初政)보다 뛰어나시고 도(道)가 요(堯)임금·순(舜)임금보다 위에 짝하시니, 지극히 축하하고 지극히 축수합니다. 신은 선조(先祖) 이래로 가세(家世)에서 상국(上國)3198) 에 빙문(聘聞)을 통하지 아니한 적이 없기 때문에, 경인년3199) 가을에 일개 암자승(菴子僧)과 석도문(奭都聞) 등을 차견(差遣)하여서, 옛날의 맹세를 닦으며, 또 토의(土宜)의 미미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다행히 금상 황제(今上皇帝)3200) 께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시는 초정(初政)을 만나서, 눈으로는 한(漢)나라 관리의 위의(威儀)를 보겠고, 귀로는 주(周)나라 시(詩)의 가송(歌頌)을 듣겠으니, 아아, 성대(盛大)합니다. 실로 문무(文武)의 나라인지라 영우(榮遇)하기가 너무나 크옵니다. 전사(專使)3201) 가 일을 끝마치고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매, 화로 동반(火爐銅盤) 1개와 동경(銅磬) 1개를 더하여 내려 주시니, 이미 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감격하고 기쁜 마음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만복사(萬福寺)의 주지(住持) 양영 서당(亮瑛西堂) 등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박(薄)한 폐물(幣物)을 바치어 오로지 황제께서 왕위를 이으신 것을 배하(拜賀)하게 합니다. 신은 비록 먼 하늘, 먼 바닷가의 땅에 있어서 위궐(魏闕)3202) 아래에 달려가 마음을 바치지는 못하나, 구구(區區)한 단성(丹誠)3203) 을 엎드려 예찰(睿察)하여 주시기를 빌며, 그리하여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의 봉지(封地) 안의 백주(伯州)에 만복 선사(萬福禪寺)라고 하는 옛 사찰(寺刹)이 있는데, 허물어져 무너진 지가 세월이 오래 되었으므로 장차 다시 영조(營造)하려고 하여, 저번 때에 상국(上國)에 조연(助緣)3204) 을 구(求)하였으나, 너그러이 용납하여 주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는 바는 대왕께서 관인(寬仁)으로써 포금(布金)3205) 의 봉시를 속히 행하여 주시면, 불각(佛閣)과 승방(僧房)을 일시에 다시 옛날처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길이 성수(聖壽)가 만안(萬安)하시도록 봉축(奉祝)하는 일단이 될 것입니다. 하정(下情)3206) 은 지극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않은 방물(方物)을 별폭(別幅)에 갖추었습니다.”||}}} * 일본 [[다이묘]]들의 사신들이 [[조공]]을 바치며, '[[황제]] [[폐하]]'라 불렀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407026_002|실록1]],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507027_003|실록2]]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조선의 외왕내제 체계,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정치체 간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동아시아에서 황제 또는 황제국,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외교 관계는 황제국이 물질적인 것을 받고(대표적으로 조공) 타국의 군주를 봉작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시스템이었으므로 이에 근거한다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대내외적으로 공식적인 것으로 확정하지 않았을 뿐. 유사하게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의 신하도 성종을 '[[황제]] [[폐하]]'라 불렀다.[* 쇼군이 보낸 사절이 아니고 이세의 태수인 '정친'이 보낸 사절이다. 그러나 당시 이세노카미는 따로 있어 '정친'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유력해보이는 건 당시 무로마치 막부 만도코로(政所)의 집사이자 이세노카미였던 이세 사다치카(貞親)가 아닌가 싶은데 한자 표기가 다르다.] [[http://sillok.history.go.kr/popup/viewer.do?id=kia_10108024_002&type=view&reSearchWords=&reSearchWords_ime=|실록]] * 동물애호가였다. 실제로 동물을 좋아해서 궁중에서 애완동물을 키웠다. 특히 동물들 키울려고 하다가 사료값 문제로 신하들이 강하게 반대해서 의견충돌이 많았다. 동물 수입 건수가 사슴 51건, 노루 31건, 송골매 25건, 물소 23건, 원숭이 15건, 고양이 15건, 개 11건, 낙타 3건, 공작새 4건, 고니 7건, 앵무새 2건이나 되었다. --언제는 원숭이에게 집을 지어주고 옷도 입혀주려고 하다가 신하들이 비용 문제를 들어 "백성들은 누더기 한 벌 제대로 못 입고 쌀밥조차 못 먹는데 절대 안 됩니다."라며 강력하게 반대했고 크게 다투어 살벌해진 궁궐에서 신하 한 명이 원숭이 흉내를 내면서 "제가 전하의 원숭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자 성종이 화를 풀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됐다.--[* ] 이를 모티브로 지어진 대체역사물이 바로 [[짐승조선]]이다. *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무덤을 [[도굴]]해서 무덤 안에 있던 부장품들을 모조리 다 가져가고 재궁을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성종의 [[시신]]이 한 줌의 재로 불타버려 유실되었다.[* 성종과 [[정현왕후]]가 묻힌 [[선릉]] 안에는 시신이 없다. 즉, 가묘(假墓) 상태이다.] 이로 인하여 다른 조선의 임금들은 어진이 소실되었어도 시신만 스캔하면 [[얼굴]]을 알아낼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성종의 진짜 얼굴은 하필 어진과 시신까지 모두 소실되어 할아버지 세조처럼 어진이 극적으로 발견되지 않는 한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