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체성사 (문단 편집) == 성체성사의 효과 == 성찬례의 최종적인 효과는 성체를 먹은 인간을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그리스도의 뮈스테리온적 몸'{{{-2 (corpus Christi mysticum, 그리스도의 신비체)}}}[* 뮈스테리온{{{-2 (신비)}}}은 '유한한 정신으로는 이성적으로 깨달을 수 없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 혹은 '하느님 은총의 상징적 표지'{{{-2 (=성사)}}}를 말한다.], 곧 '교회'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똑같다. || [[가톨릭|{{{#000 가톨릭 미사 통상문}}}]] 감사 기도 제4양식 제2에피클레시스[* 『로마 미사 경본』 631면, [[https://missa.cbck.or.kr/ordomissae|「미사 통상문」]] 122항,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7. 전례문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개신교|{{{#000 개신교 BEM 예식서}}}]] 감사 기도 제2에피클레시스 || ||주님, 몸소 교회에 마련하여 주신 이 제물을 굽어보시고[br]'''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받으려는 저희가 모두'''[br]'''성령으로 한 몸을 이루고'''[br]그리스도 안에서 산 제물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소서.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할 때[br]저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br]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과 한 마음이 되게 하시고'''[br]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산 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 실제로, 동서방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전례 문헌집인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2 ''Traditio Apostolica''(3세기 초)}}}에서는 유일한 에피클레시스가 성찬 제정문 뒤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있으며, 성체성사를 교회론적 맥락에서 본다. || 라틴어 역본 || 에티오피아어 역본 || ||청하오니, 거룩한 교회의 예물에 당신 성령을 보내 주소서. 거룩한 (신비에) 참여한 우리 모든 이를 일치시켜 주시고 진리 안에서 믿음이 굳세지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청하오니, 거룩한 교회의 예물에 당신 성령을 보내 주소서. 거룩한 (신비에) 참여한 우리 모든 이를 결합시켜 주시고, 진리 안에서 믿음이 굳세어지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 ||<-2> [[히폴리투스]], 《사도 전승》 제4장, [[이형우(종교인)|이형우 아빠스]] 역주, 분도출판사, 1992, p.87-89 || 다만 성사의 최종 효과에 대해선 의건이 똑같아도, 성사의 중간 효과, 곧 이 교회적 결합을 가능케 하는 '그리스도의 성체 속 현존'이 과연 무엇인가는 점에서는 특히 종교개혁 시대 서방에서 극심한 논란이 되었다. 이런 신학적 해석은 주로 5~6가지 범주가 있으며, 각각 다음과 같다. 순서는 성변화 성찬론과의 신학적 거리에 따라 배열하였다. 1. 실체변화(實體變化, Transubstantiation)[* [[개신교]] 신학자들은 '화체설'(化體說)이라고 하기도 한다. 가톨릭에서의 공식적인 용어는 '실체변화(實體變化)'이다. 용어 자체가 교파의 관점 및 해당 주제의 위상을 대표하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용어 자체를 놓고 논쟁을 하기에 용어의 선택은 민감한 문제이다. 다만 개신교의 주된 입장은 [[성만찬]] 항목에서 설명하므로 여기에서는 가톨릭의 용어를 사용.]: 빵과 포도주의 실체{{{-2 (substantia)}}}는 몸과 피의 실체로 변화하고, 빵과 포도주의 우유{{{-2 (accidens)}}}[*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의하면, 우유는 양{{{-2 (quantitas)}}}, 질{{{-2 (qualitas)}}}, 관계{{{-2 (relatio)}}}, 장소{{{-2 (ubi)}}}, 시간{{{-2 (quando)}}}, 자세{{{-2 (situs)}}}, 소유{{{-2 (habitus)}}}, 능동{{{-2 (actio)}}}, 수동{{{-2 (passio)}}}이다. 성체성사의 경우 빵의 외형적 모습과 맛, 질감 등이 우유에 속한다. '우유' 개념에서 주의할 점은, 우유는 환술이나 가짜가 아니란 점이다. 곧, '빵의 모습을 한 몸'에서 아무튼 '빵의 모습'은 진짜이다. 그렇기에 성체성사에서 현대 물리학적 의미의 '물질'이 변화한다고 말하는 건 오해를 부를 수 있다. 현대 물리학적 의미의 '물질'은 우유에 기반한 개념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질료'와 다르기 때문이다. 곧, 빵의 양, 빵의 질, 빵의 관계, 빵의 장소, 빵의 시간, 빵의 자세, 빵의 능동, 빵의 수동을 가진 것은 설령 '몸의 실체'라고 하더라도 현대 물리학적 의미에서는 '빵의 물질'이다. 물론 '물질'의 변화라는 것이, 그 '물질'의 실체{{{-2 (형상과 질료)}}}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한에서, '물질'이 변화되었다고 할 수는 있다. [br]참고로 이 부분은 서양인들에게 정말 난해한 부분인데, 영어 substance와 프랑스어 substance는 라틴어 substantia{{{-2 (실체)}}}가 어원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는 {{{-2 (현대 물리학적 의미에서의)}}} '물질'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Transubstantiation{{{-2 (실체변화)}}}라는 말을 들은 언중은 자연스럽게 '물질변화'와 혼동하는 참사가 쉽게 일어난다. 반면 한국어 '실체'는 누가 봐도 형이상학적 언어이기 때문에 다행히 이런 혼동의 여지가 적다.] 등은 그대로 남아서 실재{{{-2 (몸과 피의 실체)}}}를 가리키는 상징[* '상징'이라는 키워드에 오해가 많은데, 이 키워드의 사용 자체는 가톨릭 교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정통 스콜라 성사론에 반드시 필요한 표현이다. 애당초 성사{{{-2 (sacramentum)}}}라는 말부터가 라틴어에선 '상징적 표지'란 의미이다. 스콜라학의 성사론에선 '실재{{{-2 (res)}}}'와 '성사{{{-2 (sacramentum)}}}'를 구분하는데, 가령 성체성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우유{{{-2 (accidens)}}}가 sacramentum이다. 그리고 res는 몸과 피의 실체이며, sacramentum 은 res{{{-2 (몸과 피)}}}를 겨냥하는 상징이다. 즉 눈 앞에 있는 빵과 포도주의 모습이 몸과 피를 상징한다는 점에선 가톨릭이든 츠빙글리이든 견해가 똑같다. 여기서 차이는, 가톨릭은 빵과 포도주의 모습 속에 몸과 피의 실체가 정말로 있다는 것이고, 츠빙글리는 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br]희랍 교부들 및 이에 기반한 정교회 측 성사론도 근본적으론 '실체변화'와 같다. '실체변화'라는 용어는 라틴 스콜라학의 발명품이지만, 희랍 교부들은 성체가 완전히 몸과 피의 실재이면서도 동시에 상징이라고 플라톤적으로 표현하여, 라틴 스콜라학이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 것과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애당초 가톨릭의 트리엔트 공의회 역시도 라틴 스콜라학적인 개념으로서의 '실체변화' 자체를 믿을 교리로 고정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실체와 우유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방식 자체를 교의적으로 믿을 필요까지는 없다. 다만 '실체변화'라는 설명이 가리키는 것이야말로 '믿을 교리'이고, 이것이 정교회와 완전히 똑같은 것이다.]이 된다는 입장이다. ([[가톨릭]], [[성공회]] 고교회파의 일부[* 말 그대로 [[성공회]] 고교회파 중에서도 일부가 성변화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톨릭]]·[[정교회]]로부터 성사의 유효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성체 신심의 문제가 아니라 성찬례를 거행하는 성직자의 자격의 문제와 교리논쟁의 문제이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성공회의 [[사도전승]]과 [[사도적 고려|성례전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성공회 성직자에게 성체, 성혈을 축성할 능력(유효성 관련)과 권한(합법성 관련)이 없다고 본다.]) 1. 성사적 임재설(聖事的臨在說)[* 성공회의 공식 입장. 실재적 임재설이라고도 한다. 성공회는 신자들이 성체성사에 대해 여기 소개된 실체변화부터 기념설까지, 어떤 입장을 취해도 모두 관용한다. 어쨌든, 공식 입장은 성사적 임재설이다.]: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고 보지는 않으나,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에 영적으로 '임재'한다(함께하신다)고 보는 입장([[성공회]]). 신자가 영해야 성찬의 의미가 있다는 뉘앙스다. 1.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ation)[* 共在說. [[마르틴 루터]]의 해석이다. 정작 [[루터교회]]에서는 공재설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공재설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톨릭에서 왔기 때문 실질적 임재설 혹은 실재설이라 부른다.]: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다'고 보는 입장([[루터교회]]) 1. 영적 임재설(靈的臨在說)[* [[칼뱅]]의 해석이다.] :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함께하신다고 보는 입장([[장로회]]) 1. 실제적 임재설(實際的臨在說, 절충설) : 성사적 임재설과 영적 임재설의 절충적인 입장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하는(Real Presence) 영적 사건이다. 성찬은 단순히 기념이나 상징이 아니라, 바르게 행해지고 수찬자가 믿음으로 받을 때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하고 그 현존이 생생하게 체험되는 사건이 된다.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임재하고 수찬자는 그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 이것은 화체설이나 공재설이 아니라, ‘영적으로 실제로’(Spiritually really)임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진정한 임재’(True Presence)를 의미하는 것이다.([[감리교]])(웨슬리안 계열)[*출처 웨슬리의 성만찬, 김진두, [[http://m.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89]]] 1. 기념설(記念說)[* [[츠빙글리]]의 해석이다. '상징설'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절충설'을 '상징설'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침례회]]) 간단히 요약을 하자면, 성체성사 시 가톨릭·정교회·성공회는 빵과 포도주가 진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being)고 믿고, 성공회·루터회·장로회는 주께서 함께하신다(accompaning)고 생각하며, 침례회는 단순히 상징한다(symbolizing)고 주장한다[* 침례회는 여러모로 가톨릭·정교회 등의 보편교회들과 대척점을 형성하는 교회로 보고있는데, 이렇듯 성찬론에 대해 침례회의 급진적인 성격도 이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중에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바뀐다고 믿는 경우는 [[가톨릭]]과 [[정교회]]와 [[성공회]]이다. 다만 '실체변화'라는 용어 자체는 가톨릭의 것이고, 정교회와 성공회에서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 따로 용어를 써가며 설명을 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가톨릭·정교회의 경우 성체성사에 대한 이해가 같지 않는 다른 교파의 영성체를 막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른 교파의 경우 실체변화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종교개혁]] 시기에 나타난 개신교의 경우 실체변화를 믿지 않았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라 불리는 [[마르틴 루터]]의 경우 공재설을 주장하였고, [[츠빙글리]]는 기념설을, 그리고 [[장로회]]의 시초인 [[장 칼뱅]]은 영적임재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성공회]]의 [[존 웨슬리]] 신부로 인해서 나온 [[감리회]]의 경우 절충설을 지지하였다. 성공회는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성사적 임재설이 공식적인 입장이지만 교인 개개인의 신앙으로서 실체변화를 정죄하지는 않으며, 빵과 포도주가 진실로{{{-2 (truly)}}} 예수의 몸과 피의 실재{{{-2 (reality)}}}로 변화한다{{{-2 (change)}}}는 것은 믿는다.[* 이는 미국에서 있었던 가톨릭-성공회 공동 선언을 근거로 한다: 「We affirm that Christ in the eucharist makes himself present sacramentally and truly when under the species of bread and wine these earthy realities are changed into the reality of his body and blood.」{{{[}}}성체 속에서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성사적으로 그리고 참되게 현존케 하십니다. 이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서 지상적 실재들이 그분의 몸과 피의 실재로 변화합니다{{{]}}} {{{-2 (〈Five Affirmations on the Eucharist as Sacrifice, Anglican-Roman Catholic Dialogue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한편 위의 일직선상에 위치시키기 애매한 이론으로 스호넨베르크 등의 가톨릭 신학자가 제시한 "의미변화" 혹은 "목적변화" 설이 있다. 예를 들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편지를 주고받는다면, 이 편지는 편지를 쓴 사람을 인격적으로 현존하게 하는 매체, 표지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축성된 빵과 포도주는 물질의 변화는 없으나 그 의미와 목적이 변하게 되어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에 있는 이들에게는 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현존하게 하는 표지가 된다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이다.[*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 "[[7성사|일곱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1, 184~186p.] 교황청은 여기에 대해 성변화가 주관적이라는 오해를 줄 것이라는 우려를 표했지만, '의미변화'와 '목적변화'라는 해석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애당초 '의미변화'와 '목적변화'라는 설명부터가 가톨릭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현대인에게 번역해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런 해석의 차이는 굉장한 '''논란거리'''이다. 이 성사에서 축성한 [[빵]]과 [[포도주]]가 가톨릭·정교회의 해석대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되느냐, 혹은 [[츠빙글리]]의 해석대로[* 엄밀히 말하면 이는 칼빈의 해석과는 구분되지만, 가톨릭의 교과서적 이론인 ‘실체변화’와 가장 직관적으로 구분되면서도 교육적으로 간단하기에 츠빙글리의 설명이 선호된다. 칼빈 역시도 초기에는 츠빙글리에 가까운 성만찬 신학을 가졌으나, 이후 루터에 가까워졌고, 이후에 다시 중간 지점으로 옮겨가면서 성만찬 신학을 발전시켰다.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35196|#]]] '그저 상징일 뿐'이냐 여부는 지금도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서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떡밥과 함께 분란을 일으키는 주요 논란거리이다. 그렇기에 [[가톨릭]]·[[정교회]]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많이 모이는 종교 관련 홈페이지에서 저 주제로 가열차게 토론하는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실은 이 주제는 철학적으로도 매우 말이 많았다. 심지어는 [[지동설]]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마저도 젊은 시절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한 적이 있었다. [[교회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가톨릭과 성공회가 합의한 공동 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5. '''속량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 설명에서 희생 제사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사용되었다. '''신약에서 희생 제사의 언어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役事)를 주로 일컫는다. 교회 전통에서는, 가령 전례들에서 증명되는데, 유사한 언어가 성찬 거행에서 이 역사적 사건의 기념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동시에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역사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오직 하나의 반복될 수 없는 희생 제사만이 있다. 성사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성찬례는 희생 제사이다. 역사적 희생 제사가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만 하다면.''''[* '''In the exposition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redemption the word sacrifice has been used in two intimately associated ways. '''In the New Testament, sacrificial language refers primarily to the historical events of Christ's saving work for us. The tradition of the Church, as evidenced for example in its liturgies, used similar language to designate in the eucharistic celebration the anamnesis of this historical event. Therefore it is possible to say at the same time that''' there is only one unrepeatable sacrifice In the historical sense, but that the eucharist is a sacrifice in the sacramental sense, provided that it is clear that this is not a repetition of the historical sacrifice.'''] >그러므로 유일하고 역사적이며 반복될 수 없는 희생 제사만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단 한 번 봉헌되었고 성부에 의해 단 한 번 받아들여졌다. 기념의 거행에서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성사적 방법으로 되신다. 교회는 그분의 자기 봉헌으로 들어간다. 결국, 설령 교회가 그 거행에서 능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그 어떤 효험도 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의 행위는 희생 제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찬례 거행에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선물에 감사를 드리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의지와 동일시한다. 그분께서는 인류를 위해 아버지께 자신을 봉헌하셨다.[* There is therefore one historical, unrepeatable sacrifice, offered once for all by Christ and accepted once for all by the Father. In the celebration of the memorial, Christ in the Holy Spirit unites his people with himself in a sacramental way so that the Church enters into the movement of his self-offering. In consequence, even though the Church is active in this celebration, this adds nothing to the efficacy of Christ's sacrifice upon the cross, because the action is itself the fruit of this sacrifice. The Church in celebrating the eucharist gives thanks for the gift of Christ's sacrifice and identifies itself with the will of Christ who has offered himself to the Father on behalf of all mankind.] > >6.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그분의 진실한 현존을 전제하며, 빵과 포도주가 유효한 표지가 된다. 빵과 포도주는 이 뮈스테리온 안에서 그분의 몸과 피가 된다.'''[* Communion with Christ in the eucharist presupposes his true presence, effectually signified by qthe bread and wine which, in this mystery, become his body and blood.] >---- >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https://www.anglicancommunion.org/media/105260/final_report_arcic_1.pdf|FIRST 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EUCHARISTIC DOCTRINE - ELUCIDATION (1979)]] >'''빵과 포도주의 형상{{{-2 (species)}}} 아래서 이 지상적 실재들{{{-2 (realities)}}}이 그분의 몸과 피의 실재{{{-2 (reality)}}}로 변화될{{{-2 (changed)}}} 때,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성사적으로{{{-2 (sacramentally)}}} 그리고 진실로{{{-2 (truly)}}} 현존{{{-2 (present)}}}하십니다.'''[* We affirm that Christ in the eucharist makes himself present sacramentally and truly when under the species of bread and wine these earthy realities are changed into the reality of his body and blood.] >---- >the Anglican-Roman Catholic Consultation USA, [[https://www.usccb.org/committees/ecumenical-interreligious-affairs/five-affirmations-eucharist-sacrifice|Five Affirmations on the Eucharist as Sacrifice(1994)]] 이와 유사하게 [[프란치스코 교황]]이 루터교 교회 방문시 "그곳에서도 주님께서 계심을 믿는다."는데 동의한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오셨으니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바와 같이 똑같이 하십시오. 그것이 루터파의 용어든 가톨릭의 용어든 상관없습니다. 같은 거니까요. (중략) 제 동료 사목자는 제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도 주님께서 계심을 믿는다"고 말입니다. 현존하시고말고요. 여러분은 주님이 현존하심을 믿습니다. 이게 뭐가 다른 거죠?" ([[프란치스코 교황]], 『아직도 뒷담화 하시나요?』, [[가톨릭출판사]], 2016, 교회 인가 2016, 89-90p)][* 다만 이 발언이 가톨릭 교회의 공식입장인 것은 아니다.] 이런 이해의 차이에 의해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달라진다. [[정교회]]와 [[가톨릭]]의 경우 실체변화를 믿기에, 그리스도가 행한 그대로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정교회는 누룩을 넣은 빵과 포도주를, 가톨릭은 면병(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포도주를 사용한다. 정교회는 [[최후의 만찬]]이 과월절이 아닌 과월절 예비일[* 요한 13,1.]에 있었던 일이므로, 과월절 음식이 아닌 실제로 일상에서 먹는 빵, 즉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하며, 누룩없는 빵 사용에 크게 반대한다. 반면에 가톨릭은 최후의 만찬이 과월절(파스카) 축제 첫날 밤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마가 14,16.] 누룩없는 빵을 먹는 유대의 관습을 따라 면병을 사용한다.[* 다만 초기에는 서방교회도 누룩 넣은 빵을 쓰다가, 8세기에 누룩의 유무여부는 교리상 중요하지 않다며 성체 부스러기를 흘리지 않는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지금과 같은 제병을 쓰게 된 것이다. 15세기의 피렌체 공의회에서 누룩 없는 빵의 사용이 [[가톨릭]] 교리로 확정됐다. 유대에서 파스카 축일에 먹는 무교병과 가톨릭의 성찬에 쓰는 제병은 실제론 상당히 다르다. 참고로 성혈도 초기에는 적포도주였으나 잘못해서 흐르면 얼룩이 안 지워지기에 성혈 또한 실용적인 이유로 백포도주를 사용한다.] 이런 [[축성]]이나 성변화의 개념이 없는 개신교[* 루터회와 성공회는 제외한다. 이들 교파는 실체변화를 믿진 않지만 성찬식 때 축성 개념은 있기 때문. 이 둘은 가톨릭·정교회처럼 다른 빵이나 포도주스를 사용하지 않고 면병과 포도주를 사용한다. 루터회와 성공회는 [[한국의 개신교]]에서 소수 교파여서 낯설 수는 있겠지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세계 개신교에서는 오히려 저 교파들이 장로회나 감리회 이상의 메이저 교파이다.]처럼 그냥 일반 빵, 보통 '''[[카스테라]]'''와 '''[[웰치스|포도주스]]'''를 사용하는 일이 절대 없다. 더 나아가 이는 성체성사의 횟수에도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가톨릭·정교회는 매일 미사마다 성체성사를 하며, 성공회 및 고교회파 루터교의 경우 매주 성체성사를 진행한다. 그러나 나머지 개신교 교파들은 성찬례 없는 예배가 일반적이다. 성찬례를 자주 해야 1달에 1번 정도이고, 보통은 분기에 1번(1년에 4번) 혹은 반기에 1번(1년에 2번) 정도 진행한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 직접 명하신 전례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물론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개신교들의 반성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는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에 기인한다. 가톨릭·정교회·성공회 및 고교회파 루터교와 같은 주교제 교회들은 ([[주교좌]]교회가 아닌 일반적인 교회라면) 주일[[미사]]/[[예배]]에 참례하는 신자 수가 100명 내외이다. 이에 반해, 개교회주의 개신교 교회는 조금만 커져도 출석 신자가 천 명을 넘어가게 되고, 지방 중소도시들에도 수천 명이 출석하는 교회들이 몇개씩 있으니, 매주 성찬례를 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개신교 교회들이 분기 혹은 반기에 한 번 정도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은, 안하는 게 아니라 못 지키고 있는 것. 개신교 내에서도 원래는 매주 성찬례를 하는 게 맞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