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충(백제) (문단 편집) == 생애 == >'''[[성충(백제)|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렇게까지 된 것을 후회한다.'''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무너뜨리자 내뱉은 한탄. 《삼국사기》에서 발췌. 기록에는 백제의 당시 최고 관직이었던 좌평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의자왕은 타락하기 전까지는 몹시 유능한 성충을 중용하며 몹시 아꼈으나, 656년 3월 부로 [[의자왕]]이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타락하여 정사는 멀리 한 채 사치 및 향락에 빠지자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이에 의자왕이 분노해 끝내 투옥되면서 조정에서 의자왕에게 충언을 하는 자들은 다 사라졌다. [[단식]]하다가[* 스스로 단식한 게 아니라 의자왕이 [[음식]]을 일절 못 주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끝내 옥중에서 숨을 거두게 되는데, 사망 직전 자신의 [[피]]로 의자왕에게 [[혈서|마지막 간언을 지어 올린다]][* 혈서가 아니라 종이에 붓으로 글씨를 썼다는 설도 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의자왕은 이조차 듣지 않았고, 또다른 충신 [[흥수]]도 옥중에서 비슷한 간언을 했지만 이 또한 의자왕이 무시해[* 다만 완전히 무시했다기보다는 투옥되어 나라에 앙심을 품은 자의 의견이라 믿을 수 없다는 다른 대신들의 상소 때문에 결정을 내리는 게 늦어져서 저렇게 되었다는 추측이 있다. 실제 [[사료(역사)|사료]]에서 흥수가 간언을 하자 무시하기는커녕 성충과 똑같은 얘기 아니냐면서 빨리 저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의자왕이 다급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자국에서 손꼽히는 [[브레인]]이자 충신 2명이 제시한 작전을 결국 못 써먹었다는 거다.] 결국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험한 지형에서 방어하는 대신 벌판에서 막으려다 끝내 참패했고, 의자왕은 뒤늦게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다고 탄식했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 당시 [[일본]]의 [[역사서]] 등씨가전(藤氏家傳)에 나온 평가를 보자면 '[[신라]]에는 [[김유신]], [[백제]]에는 성충, [[고구려]]에는 [[연개소문]], [[당나라]]에는 [[위징]]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서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라는 언급이 있다. 즉, 당대에 백제를 대표하는 명신으로 평가받았다는 뜻이다. 기록 부족으로 묻혀서 그렇지 당대 [[네임드]]와 어깨를 견주는 위상을 가지고 있던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지략이 무척 뛰어나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도 그의 비범한 행적이 서술되어 있다. 어린 시절[* 다만 일설에 의하면 어린 시절이 아니라 중노년 시절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적국에서 선물로 음식을 보내자 사람들이 기뻐하며 열어보려는데, 적장이 갑자기 선물을 보낸 게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뒤 다 불태우라고 지시하자 그렇게 했는데, 안에는 많은 양의 무서운 땡삐([[땅벌]])들이 불에 타 죽어 있었고, 그 다음에도 선물이 오자 또 속을 줄 아냐며 불 속에 집어던지려고 하자 이번엔 그냥 열어보게 했는데, 거기엔 [[폭발물]]들인 유황과 염초가 들어있었다. 그 다음에도 선물이 오자 이번에는 톱으로 켜게 했는데, 그러자 그 안에서 사람의 비명소리와 함께 핏자국이 나왔다. 그 안에 있던 것의 정체는 칼을 쥔 자객으로, 톱질로 인해 허리가 끊어져 죽어 있었다고 한다. 만일 멋모르고 열었다면 성충은 그 놈에 의해 개죽음을 당하고도 남았을 일.[* [[곽재우]]가 [[임진왜란]] 당시 이런 비슷한 작전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단재 신채호가 참고한 [[야사(역사)|야사]]의 저자가 곽재우의 전설을 차용하여 성충의 일대기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열정과 달리 가난한 형편으로 인해 정밀한 사료 비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나 구한말에 발간된 야사들이 대거 조선상고사 등에 실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