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계사 (문단 편집) === 철학과 종교의 발달 === ||[[파일:04_간다라_양식_불상.png|height=150]] || [[파일:statue-of-confucius-chinese-school.jpg|height=150]] || [[파일:external/media1.britannica.com/75569-004-3B260631.jpg|height=150]] || || [[석가모니]] [br] {{{-2 (기원전 480? ~ 400?)}}} || [[공자]] [br] {{{-2 (기원전 551 ~ 479)}}} || [[소크라테스]] [br] {{{-2 (기원전 469 ~ 399)}}} || 고대 시대의 인류는 전 세계적인 [[철학]]과 [[종교]]의 동시다발적 발달을 목격했다. [[독일]]의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1949년의 그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이 시대를 거시적이고 역사철학적인 시선으로 분석하였고, 기원전 800년경에서 서기 200년경 사이를 ''''축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축의 시대]]에는 [[유라시아]] 전역, 정확히는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직접적 문화교류 없이 독자적으로 철학적, 종교적 발달이 나타났는데, 중국에서 출현한 [[유교]]와 [[도교]], 인도에서 출현한 [[불교]]와 [[자이나교]], [[고대 그리스]]의 철학 사조, 페르시아에서 출현한 [[조로아스터교]]와 레반트에서 출현한 [[유대교]] 등의 [[유일신교]] 등이 전부 기원전 800년을 기해 600년경에 특히 발달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시대에 정립된 철학과 종교들이 발달, 확산, 교류되며 세계 각각의 문명의 역사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고, 더 나아가 현재까지의 역사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전 세계의 인류가 이 시대의 산물의 종교적, 철학적 사상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되었다.[*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불교]]와 [[유교]]의 영향력이 아직까지도 한국인의 생활에 진하게 남아있으며, 다수의 한국인이 믿는 [[기독교]] 또한 축의 시대 즈음에 중동에서 비약적인 발달을 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자 [[유일신교]]이다. 현대세계 4대 종교로 손꼽히는 [[기독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의 경우, 전자의 2개의 경우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며 후자의 2개의 경우 축의 시대의 인도에서 출현, 발전하였다.] [[동아시아]]에 특히 영향을 끼친 것은 중국의 동주시대에 쏟아져 나온 [[제자백가]] 사상으로, [[춘추전국시대]]를 겪으며 제후국들이 부국강병을 추구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던 배경 속에서 다양한 사상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공자]], [[맹자]], [[순자]] 등이 주장한 가족 윤리를 중시하여 중국 주류 사상을 수립한 [[유가(제자백가)|유가]], [[노자]], [[장자]] 등이 주장한 자연의 순리를 따를 것을 주장하여 중국인들의 자연관, 예술관에 영향을 끼친 [[도가]], 그리고 [[한비자]]가 집대성 한 [[엄벌주의]]를 통한 사회 질서 유지를 주장한 [[법가]] 등의 사상들이 탄생해 중국사에 큰 정치적, 철학적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유교]]는 이후로도 20세기까지 정치, 제도, 철학, 종교 등에 넓게 걸쳐 동아시아 세계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남아시아]]에서는 기원전 7세기경에 [[우파니샤드]] 철학이 등장하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자이나교]], [[힌두교]]와 [[불교]] 교리의 이론적·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우파니샤드]]는 현대의 대중에게 친숙한 [[업]](業), [[윤회]](samsara) 등의 개념을 맨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며, [[종교]]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 [[철학]]의 기본적 근간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기원전 6세기경 [[마하비라]]가 아주 엄격한 계율과 고행을 통해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인 [[자이나교]]를 창시했다. 또한 유사한 시기에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침에 따라 [[불교]]가 탄생했고, 평등과 윤리적 실천을 통한 해탈이라는 개념이 크샤트리아와 바이샤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기원전 4세기경 북부 인도를 통일하고 [[마우리아 왕조]]를 수립하여 [[아소카 대왕]] 시기에 전성기를 이룩했는데, 신실한 불자였던 아소카 대왕의 치하 아래 불교 철학, 문학, 예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고, 그러한 흐름 속에서 [[상좌부 불교]]가 발달하여 [[동남아시아]] 세계로 전파된다. 한편 1세기 무렵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 시기에 새로운 형태의 불교이자 대중의 구제를 강조하는 [[대승 불교]]가 출현하였는데, 대승 불교는 [[중국]]에 전파되고 곧 [[삼국시대]]의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도 전파되게 되어 동아시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7세기 [[송첸감포]] 왕 때 [[티베트]]에 불교가 전해지고 8세기 티송데첸 왕이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베트에 불교가 자리잡기 시작하였는데,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정통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고, [[밀교]]에 영향을 받으며 곧 [[티베트 불교]]라는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서아시아]]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 [[자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게 된다.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페르시아에서 그는 선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는 유일신교를 창시하였고, 세상이 선과 악의 대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 천국과 지옥의 개념, 그리고 [[구세주]]의 개념과 같은 세계관을 창시했다. 조로아스터교는 동부 이란을 중심으로 여러 이란계 종족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추종하는 [[메디아]]와 [[아케메네스 왕조]]가 서아시아의 패권을 쥐면서 급성장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아케메네스 왕조가 패망하자 조로아스터교 역시 국교의 지위를 잃고 약화되었고, 이후 [[헬레니즘 제국|헬레니즘]] 시대와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치면서 [[아나히타]]나 [[미트라]] 등 하위신격들을 숭배하는 변종 분파들이 널리 퍼졌으나, [[사산 왕조]]가 등장하며 사산 왕조는 그 이전 400년 동안 이란을 지배한 파르티아인들의 유목민적 전통과 느슨한 봉건제도, 타 종교나 문화(특히 헬레니즘)에 대한 호의적 태도 등을 비난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을 주창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국가권력 강화와 사회 통합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 초기 조로아스터교는 정통 교리와 경전을 확립하는 작업, 국가권력과 연계된 관료적 성직기구의 정비 작업 등을 진행하며 다시 한번 국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종교들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고, 반대로 유대교, 기독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서기 3세기에 [[마니교]]라는 종교도 생겼으나 [[사산 왕조]]에게 이단으로 취급받아 탄압을 당했다. [[유럽]]에서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데, [[탈레스]]를 시작으로 [[소피스트]]들의 출현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자들에 의해 서양 철학의 기틀이 잡히게 된다. 최초의 서양 철학은 '이 세계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탈레스]]는 처음으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 뒤를 잇는 철학자들 역시 답을 찾기 위해 생각하고 생각하게 되면서 서양 철학이 시작된다. [[아테네#s-6.1.2|아테네 민주정]]의 발달로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선 말솜씨가 뛰어나야만 했고, 이런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변론술과 수사학 등을 돈을 받고 가르치는 "지혜로운 자들", 즉 [[소피스트]]들이 등장했다. 소피스트들은 진리의 상대성, 주관성을 강조했는데, 이를 비판한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절대적 진리를 강조했고, 변증술을 처음으로 고안했으며, 또한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화두이면서도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을 제시했다.[*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으며, 책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언제나 미궁(aporia)의 상태에 빠지면서 끝난다. 이 미궁은 인간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그 해답은 주어질 수 없는 난제들로, 현대 철학에서까지 이른바 '실존의 부조리'로 언급되고 있다.] 그의 직계 제자인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을 비롯한 이전 철학자들을 계승하여 앎, 우주, 그리고 인간 등에 관하여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겼고, 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여 자신의 철학을 기록했다.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에서 나와 플라톤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철학적 탐구를 개진해나갔다. 예컨대 실제 자연에 대한 탐구를 보다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문학]] 등 그야말로 다양한 학문 분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에서 현대까지 계승되는 주요한 관점들을 제시하였다. 자세한 것은 [[철학사/서양#s-4|철학사/서양 문서의 '고대 철학' 소문단]] 참고. 이 철학자들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치하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팽창하며 [[유럽]] 전역과 [[중동]]으로도 뻗어나가게 된다. 한편 이러한 흐름에 해당하지 않았던 대다수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의 사람들도 근대 시대에 접어들고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축의 시대 종교/철학의 영향력 아래 놓여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