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개요 == '''세도정치'''([[勢]][[道]][[政]][[治]][* 특정한 시기에만 세도정치라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Politics by/in powers' 즉, 힘에 의한 정치이다.])는 [[국왕]]에게 위임을 받은 특정인과 그 추종 세력, 즉 소수의 외척 가문들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 독과점적 정치 형태를 말한다. 이것의 문제는 단순히 백성들이 못살겠다고 하는 것을 넘어서서 왕조나 국가를 지탱하는 사회 지도층 내에서 균열이 생기고, 따라서 소외된 다수의 사회 지도층들이 기존 체제를 대체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살 길이라고 판단하게 된다는 점이다. '정치란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말한다'라는 사림의 통치 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는 것이 '세도(世道)정치'였지만, 국사 시간에는 [[조선]] 말기에 벌어진 한양의 명문 벌열가문인 [[신 안동 김씨]](장동 김씨[* '장동 김씨'라고도 불리는 건 세도 정치를 이끈 신 안동 김씨 가문이 조선 중기 한양 내 장의동에 자리를 잡았던 일파(척화파의 거두 [[김상헌(조선)|김상헌]]이 대표격이다.)이기 때문이다.]), [[풍양 조씨]][* 풍양은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진접읍]], [[오남읍]] 일대의 옛 이름이다.], [[반남 박씨]][* 반남은 현재 전라남도 나주시의 반남면이다.]와 그 외의 일부 가문들[* 연안이씨, 대구서씨, 풍산홍씨, 남양홍씨, 경주김씨, 은진송씨, 청주한씨, 경주이씨, 덕수이씨, 동래정씨, 의령남씨, 청송심씨, 청풍김씨, 안동권씨 시중공파(舊 강릉 권씨), 연안김씨,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16개 가문]이 주도한 세도정치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대부분 혈연관계로 이어진 '''이들 19개 가문을 제외하고는 웬만큼 조선 후기까지 잘 나가던 집안들마저 중앙에서 모두 멀어진다.'''[* '''안동김씨 서윤공계 - 문정공파'''(파조는 평양서윤 김번의 증손자이자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김상헌 ←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 철종 때 영의정을 2번 지낸 [[김좌근]] 父子의 직계조상), '''연안이씨 소부감판사공계 - 월사공파'''(파조는 소부감판사 이현려의 후손이자 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구 ← 순조 초반에 영의정을 지낸 [[이시수]]의 직계조상), '''대구서씨 충숙공계 - 전첨공파'''(파조는 병조판서 충숙공 서성의 차남이자 종친부전첨을 지낸 서경수 ←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 순조 중반기에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의 직계조상), '''풍양조씨 회양공계 - 한평군파'''(파조는 회양부사 조신의 증손자이자 이조참판, 대사헌을 지낸 한평군 조익정 ← 효명세자의 세자빈인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 조씨, 헌종 중반과 철종 초반에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의 직계조상), '''풍산홍씨 문경공계 - 추만공파'''(파조는 대사헌 문경공 홍이상의 4남이자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추만 홍영 ← 사도세자의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 정조 때 도승지로써 권력을 휘두른 [[홍국영]]의 직계조상), '''반남박씨 감정공계 - 참봉공파'''(파조는 사재감정 박응천의 5남이자 참봉을 지낸 박동민 ←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직계조상), '''남양홍씨 당홍계 - 남양군파'''(파조는 남양군 홍주 ←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 홍씨의 직계조상), '''경주김씨 태사공계 - 상촌공파'''(파조는 검교태자태사 김인관의 9세손이자 형조판서를 지낸 상촌 김자수 ←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의 직계조상), '''은진송씨 정랑공계 - 우암문정공파'''(파조는 예조정랑 송순년의 6대손이자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우암 송시열 ← 홍국영 일파로써 정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송덕상]]의 직계조상), '''청주한씨 양절공계 - 공안공파'''(파조는 의경세자의 장인인 서원부원군 한확의 장남이자 호조참판, 판돈녕부사를 지낸 공안공 한치인 ← 순조 중반기에 영의정을 지낸 [[한용귀]]의 직계조상), '''경주이씨 상서공계 - 백사문충공파'''(파조는 상서 이과의 후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백사 이항복 ← 순조 때 좌의정을 지낸 [[이경일(조선)|이경일]]의 직계조상), '''덕수이씨 연헌공계 - 문정공파'''(파조는 호조참판 연헌 이의무의 5대손이자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문정공 이식 ← 정조 후반, 순조 초반에 3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이병모]]의 직계조상), '''동래정씨 첨사공계 - 문익공파'''(파조는 지세자첨사부사 정필의 9대손이자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정광필 ← 헌종 후반, 철종 후반에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의 직계조상), '''의령남씨 충경공계 - 감찰공파'''(파조는 영의정 충경공 남재의 증손자이자 사헌부감찰을 지낸 남준 ← 순조 중~후반에 10년간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의 직계조상), '''청송심씨 안효공계 - 여주공파'''(파조는 세종의 장인인 청천부원군 심온의 6대손이자 여주목사를 지낸 심우정 ← 순조 후반에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의 직계조상), '''청풍김씨 청로상장군계 - 문의공파'''(파조는 청로상장군 김중원의 5세손이자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문의공 김식 ←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의 직계조상), '''안동권씨 시중공계(舊 강릉 권씨) - 화천군파'''(파조는 좌시중을 지낸 권인가의 10대손이자 좌참찬을 지낸 화천군 권감 ← 풍양조씨의 일파로써 헌종, 철종 때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의 직계조상), '''연안김씨 내자시윤공파'''(파조는 내자시윤을 지낸 김해 ← 순조 때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김재찬]]의 직계조상), '''전주이씨 효령대군계 - 장제부정파'''(파조는 효령대군의 증손자인 장제부정 이원손 ← 순조 후반, 헌종 초반에 2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이상황]]의 직계조상)가 각 가문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조선]]이 제대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급격한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는 격동의 시대이기도 한데 비교적 대중적으로는 인지도가 소외된 시기이다. 그저 "그냥 막장인 시대" 정도로만 알고 끝나기 때문인 듯. 이 시대 앞에는 [[영조]]와 [[정조(조선)|정조]], 뒤에는 [[흥선대원군]]이라는 대형 떡밥이 있는 탓일지도 모른다. 결국 세도정치는 정조 시대 사극에서 "명군 정조가 승하하고 조선은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식의 [[에필로그]] 정도로 다뤄지거나, 고종 시대 사극에서 "(신) 안동 김씨의 세도 아래서 흥선대원군은 그들에게 '상갓집 개'라 불리는 수모를 참으며 야망을 불태웠다" 이런 [[프롤로그]] 식으로 묘사되기 마련. 조선사를 공부하며 [[훈구파]]나 [[붕당정치]]의 폐단에 치를 떨던 학생들은 이 시대를 배울 때쯤 되면 그나마 훈구파나 붕당이 세도보다는 나았구나 하고 치를 떨게 된다. 특히 중기 이후 조선이 빈 껍데기만 남았다는 대중적인 편견과 달리 조선의 행정력, 혹은 그것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위정자들의 무능과는 별개로 전근대 국가치곤 훌륭한 편이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꼬집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부정부패 문제는 조선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초기 관료제 사회, 사실 현대까지도 어디든지 피해갈 수 없는 병폐였다. 하지만 이것도 세도정치 시기부터는 옛말이 되었고, 이후 조선이 정말 처참히 무너지는 걸 보면 나라 말아먹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 수 있다.[* 세도정치 이전까지 흔치 않았던 대규모 [[민란]]이 세도정치 시기 이후 급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민란이건 반란이건 지도부는 결국 엘리트들인데 이들이 왕조 혹은 체제로부터 반감을 가져 등을 돌린 것이다.] 또한 '''세도정치는 고종 재위기와 함께 조선 왕조의 한계점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동시에 문제점이 부각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마치 대원군하면 [[흥선대원군]]만 의미하는 것처럼 쓰이듯이, 세도정치의 대명사는 [[신 안동 김씨]]다. 왜냐하면 세도정치가 여러 세도 가문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중에서도 [[신 안동 김씨]]는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순조]], [[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의 3대에 걸쳐서 [[순원왕후]], [[효현왕후]], [[철인왕후]]를 배출한 왕실의 외척 가문이었으며 신 안동 김씨였던 [[김조순]]이 세도정치의 문을 열었고, 철종조의 마지막 세도정치 시기도 신 안동 김씨의 세상이었다. 세도정치의 시작과 끝이 신 안동 김씨의 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가문들은 어디까지나 경쟁자나 협력자의 위치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 다음 가는 가문이라면 [[풍양 조씨]]라 할 수 있다.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가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로 신 안동 김씨와 경쟁했다.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을 왕위에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3위 정도 되는 가문이라면 [[반남 박씨]]가 있다. 순조의 친모인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가 반남 박씨 [[박준원]]의 딸이었다. 세도정치기의 시작이었던 순조의 처가가 신 안동 김씨라면 외가는 반남 박씨가 되는 막강한 가문이었다. 그래서 가문의 여러 인물이 순조와 헌종 시기 요직을 차지했다. 그 외의 가문은 [[대구 서씨]], [[연안 이씨]], [[풍산 홍씨]] 등이 있다. 또 [[여흥 민씨]]([[명성황후]]가 속한 성씨)도 이 범주에 넣는 경우도 있다.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끝난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갑오개혁]] 이후까지도 척신들이 조정 곳곳에 내린 뿌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대원군 집권 후인 1872년에도 영의정은 [[김병학]]이었고, 1884년 [[갑신정변]] 당시 호조판서 [[김병시]]는 1896년 아관파천 때 총리대신까지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