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헌종(조선)|헌종]] 시대(1834년 ~ 1849년) === 이후 [[효명세자]]의 의문스러운 이른 죽음이 따르긴 했지만, 효명세자의 아들이자 순조의 손자인 헌종 집권기에 이르자 [[풍양 조씨]]는 신 안동 김씨에 못지않은 세도를 부린다. 이들은 그간 관대했던 천주교에 탄압을 가했으니, 효명세자가 장수했다고 할지라도 조선의 근본적인 면이 개혁되었을지는 의문이다. 헌종 시대에는 풍양 조씨가 신 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세도까지 부리지 않았을까라는 견해가 있다. 흔히 세도정치를 설명할 때, 순조 - 신 안동 김씨 우세, 헌종 - 풍양 조씨 우세, 철종 - 신 안동 김씨 우세로 설명하는 서적들이 꽤 있다. 헌종기에 풍양 조씨가 우세했다고 보는 근거는 첫째, [[기해박해]]의 주도 세력이 풍양 조씨라서 기해박해가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신 안동 김씨를 제어하기 위한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것. 둘째, 야사에서 헌종이 조병구에게 했다는 "외숙의 목에는 칼이 안 들어갑니까?"라고 압박을 줬다는 기록. 셋째,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와 관련해서 당시 풍양 조씨의 조병헌이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를 배출한 [[남양 홍씨]]에게 권세가 넘어갈 것을 우려해 [[광산 김씨]]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삼게 했다는 야사 등이 거론된다. 또한 당시,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유근이 [[중풍]]으로 [[상태이상]]에 걸려 있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풍양 조씨가 우세했다고 제기되는 근거들은 결정적이 되지 못한다. 야사가 섞인 것은 둘째치고 일단 기해박해의 주도 세력은 풍양 조씨가 아니라 풍양 조씨의 겹사돈인 이지연 형제였는데 결국은 그들이 주도한 박해에서 신 안동 김씨는 김건순을 비롯한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고, 특히 김조순 일가는 아무런 타격도 없었다. 게다가 이지연은 결국 신 안동 김씨의 눈 밖에 나서 숙청된다. 게다가 조병헌은 풍양 조씨 일문들 중에서도 헌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완전히 따로 놀던 사람으로 그의 행보는 풍양 조씨 전체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리고 헌종 시대에도 왕실 최고의 어른인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고, 김유근이 상태 이상에 빠져있어도 [[김좌근]]이나 김흥근 같은 김조순의 아들이나 조카들이 그 자문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보면 헌종 시대에도 신 안동 김씨의 세력이 풍양 조씨보다 좀 더 컸다는 견해가 비교적 설득력이 있다. 더욱이 기해박해를 주도한 우의정 이지연은 풍양 조씨와 겹사돈 관계였는데 기해박해 이듬해에 탄핵을 받고 [[유배]] 크리를 먹는다. 게다가 순조 32년 이후로 명실상부하게 최고 권력자로 떠오른 신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풍양 조씨가 권좌를 차지했다면 그것은 과거의 1인자인 신 안동 김씨에 대한 도전이 있었다는 소린데 정작 신 안동 김씨가 최고 세력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는 철종 시대에 신 안동 김씨가 풍양 조씨들을 압박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헌종의 신 안동 김씨 견제책에 앞장 선 조병헌이 예외적으로 사사된 일이 있긴 하지만[* 이마자도 철종 4년에 복권된다.] 그 외에 [[조인영]] - [[조만영]] 형제, 그 사촌인 조득영, 그들의 조카 조병구를 비롯한 풍양 조씨 실세들은 철종 시대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았으며, 신 안동 김씨가 편찬한 《헌종실록》, 《철종실록》에서도 매우 우호적인 기록을 해놨다. 심지어 조인영 등은 신 안동 김씨 정권 하에서 정승까지 해먹었다. 만약에 풍양 조씨가 신 안동 김씨를 능가하는 세도를 구축했다면 신 안동 김씨가 뿌린 철종조의 피바람에서 무사할 리가 없다. 헌종에게 충성하며 신 안동 김씨를 압박한 수많은 관료들이 유배가는 판국에 풍양 조씨 대부분은 무사했고 오히려 승진했다. 이를 볼 때 신 안동 김씨가 오히려 풍양 조씨들을 제어 가능한 밑의 세력으로 보고 있었다는 추론도 가능할 것이다. 더군다나 김좌근 등의 신 안동 김씨 실세들이 늙어서 물러날 즈음이 되어도 신 안동 김씨는 철저한 가문 관리로 김병국, 김병기, 김병학을 비롯한 신진 엘리트들이 많았던 반면에 풍양 조씨는 조득영, 조만영, 조인영, 조병구, 조병헌 등이 죽은 이후에는 조성하, 조영하 정도를 제외하곤 내세울 인물도 없었다. 그나마 조성하, 조영하도 김병국, 김병기, 김병학 등이 흥선대원군 및 고종에 의해 크게 쓰인 것과 대조적으로 별로 한 일도 없던 것으로 보아 실력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헌종은 성년이 된 뒤 수령의 가렴주구를 규탄하고 나름대로 세도정치를 벗어나려는 여러 시도를 했으나 일찍 [[요절]]함으로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헌종의 딸도 모두 요절하거나 자식이 없어, 왕통은 단절되었고, 이제 왕위는 방계인 철종에게로 넘어간다. 여담으로 [[유홍준]]은 딱히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은 듯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면 헌종이 외조부 조만영이 사망한 것 때문에 개혁의 의지를 잃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외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반대하는 왕족 [[경원군(1842)|이하전]] 등이 풍양 조씨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유홍준 뿐만이 아니라 사학계의 다수설이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를 신 안동 김씨에 비해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 것 같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