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흥선대원군]] 시대(1864년 ~ 1873년) === 이 사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죽으면서 [[효명세자]]의 아내인 [[신정왕후 조씨]]가 왕실의 웃어른이 되었고, 흥선군과 이해가 일치한 풍양 조씨는 철종 사후 일종의 연립 정권을 구상한다. 그 결과가 [[고종(대한제국)|고종]]이었다. 그의 재위 초반부는 흥선대원군과 [[전주 이씨]]가 주도했고, 약간의 [[풍양 조씨]],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를 포함한 병자 돌림의 [[신 안동 김씨]] 엘리트들, 권력에 소외된 [[남인]]이 중심이 된 영남 유림, [[소론]], [[북인]] 인사들의 연합체로 보면 된다. 거기에 서북인, 함경도인,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들까지도 중용되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에는 [[이최응]], [[흥친왕]]을 비롯해서 대원군에게 불만이 있었던 종친들, [[신 안동 김씨]], [[여흥 민씨]], [[박규수]]를 비롯한 일부 대원군 일파의 연립 정권이 들어선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왕권 강화를 추진하면서 풍양 조씨들은 사실상 [[토사구팽]]되었고[* 그렇다고 한고조 유방이 공신죽이듯 하는 것을 연상하면 심히 곤란하다. 애당초 조 대비와 조영하, 조성하 형제를 빼고 대원군과 커넥션이 있었던 풍양 조씨도 없었고, 그들을 마구 죽인 것이 아니라 신 안동 김씨들과 마찬가지로 풍양 조씨들에게 이전과 같은 세도 권력을 주지 않은 정도였다. 조 대비가 정치에서 물러나면서 권력을 대원군에게 준 것도 있고.] 신 안동 김씨 역시 대원군 섭정기에 세력이 크게 꺾이긴 했으나 김병학이나 김병국처럼 대원군과 관계가 좋았던 인물들이 요직에 중용되기도 했고, 대원군조차도 신 안동 김씨의 수장인 김좌근을 나쁘지 않게 대접해 주었다. 이렇게 되니 어제의 세도정치의 주범들이 오늘의 개혁 동지자가 되는 아이러니가 되긴 했지만 이들의 능력도 좋고, 대원군이 이들을 휘어잡을 정치력이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각설하고, 고종이 왕이 되고 [[흥선대원군]]이 실세가 되면서 조선에는 '''[[대격변]]'''이 일어나게 된다. 경복궁 증건에, 만동묘, [[서원 철폐]]와 호포제, 사창제 실시에 당백전 발행까지... 이전 같았으면 이야기만 나오고 바로 휴지통에 버려졌을 일들이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몇 년 동안에 전부 시행되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서원 문제와 호포제의 경우 수백년 전부터 논의는 되었지만 흐지부지 되어오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삼정의 문란]]이라 불리던 세도정치 시기의 부정부패들도 흥선군 집권기에 와서 대부분 개혁이 되었다. 쇄국정책을 고집한 흥선대원군이 까이기도 하지만 반면에 공적으로 치하받는 요소들 대부분이 조선 말 혼란의 상황을 일시적으로 수습한 정치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고종 친정과 여흥 민씨 집권 이후 다시 조선은 멸망 테크를 타게 되지만... 아무튼 세도정치로 유림이고 붕당이고 다 무력화된 상황에서 가문만 억누르면 왕권을 견제할 수단이 사라져버렸고, 흥선대원군은 그 환경을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력이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