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고종(대한제국)|고종]] 친정 시대(1873년 이후) === 그러나 대원군이 세도정치를 극복하려고 뽑아 놓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가 오히려 뒤통수를 친다. 특히 명성황후는 [[최익현]] 등을 포섭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여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토록 한 후, '''세도정치 시즌 2'''인 '''여흥 민씨 척족 정치'''를 이룬다. 1880년대 민씨 척족세력들로서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진출한 인물은 무려 260명 가량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민겸호]], [[민승호]], 민규호, [[민태호]], [[민영익]], [[민영환]], 민영위, 민치상, [[민응식]], [[민영준]], [[민영목]], [[민영원]], [[민병석(1858)|민병석]], [[민영상]], [[민영휘]](민영준), [[민영우]], [[민영소]], [[민종묵]], [[민영달]], [[민치서]] 등 20여 명의 인물이 병조, 이조, 예조 판서 및 참판직, 통리기무아문의 관직, 한성부 판윤 등의 고위 요직을 독점하여 조정은 여흥 민씨 종친회나 다름없었고 이들 여흥 민씨 일족이 정권의 핵심적 요직을 장악하여 실권을 행사했다. 민씨 일족들은 백성들을 수탈하는 데 열을 올렸고, 이로 인해 국고는 텅텅 비어 [[임오군란|군인들 월급이 1년이 넘게 밀릴 정도로]] 나라가 막장으로 굴러가게 되었다. 이처럼 단일 성씨가 조정의 요직을 독점한 것은 한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신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시절에도 신 안동 김씨가 관직을 독점한 것이 아니라 16개 세도 가문이 나눠서 관직을 차지했다. 명성황후와 [[민영환]]의 죽음으로 마치 여흥 민씨가 반일에 앞장선 것처럼 잘못 인식되기도 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민영준]], [[민영기(조선)|민영기]], [[민영은]], [[민원식(1886)|민원식]], 민규식 등 무려 38명의 여흥 민씨들이 올라와 있다.''' 개혁과 민권 신장에 힘쓰기도 했고, 최후에는 망국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기 때문에 그나마 제대로 된 민씨로 인식되고 있는 [[민영환]]조차도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보면 민중들을 수탈하던 [[탐관오리]]였던 기간이 개화파 우국지사였던 기간보다 더 긴 사람이었다. 물론 뒤늦게나마 정신차리고 달라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막장이었던 다른 여흥 민씨들보다는 당대에나 지금에나 평가가 훨씬 나은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매천야록]]》에서는 민영환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백성들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황현]]이 민영환을 까내리면 까내렸지 굳이 미화할 이유가 없음을 생각했을 때[* 황현은 명성황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말년의 민영환은 당대에도 이미 다른 여흥 민씨들보다는 나은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 다른 점이라면, 고종의 왕권이 헌종, 철종처럼 위해를 받은 건 아니라 오히려 고종이 여흥 민씨들과 결탁하여 그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적어도 여흥 민씨가 고종의 지지세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흥선대원군의 세도정치 타파의 영향도 있었고, 명성황후가 여흥 민씨들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특이한 결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흥 민씨들의 횡포는 이전 신 안동 김씨 못지 않았고 백성들에게만 부정부패, 가렴주구했던 것이 아니라 외세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이용하며 나라의 이권까지 팔아먹으며 결국 망국의 길을 재촉했다는 점에서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보다 폐해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민씨 척족은 신 안동 김씨와는 다르게 '''민심을 헤아리는 시늉조차 모자랐다.''' 예시를 들어보자면 신 안동 김씨 집권기인 철종 시기에 벌어진 [[임술농민봉기]]의 경우 그래도 봉기한 세력들은 서로 연계해서 국가를 전복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수령을 죽이는 식으로 과격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신 안동 김씨 역시도 이전대로 주동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용서해주며 삼정이정청을 설치해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는 시늉 정도는 냈다. 그러나 민씨 척족의 경우 [[동학 농민 운동]]의 사례에서 보듯 고부 지역에서의 단순한 농민운동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문제를 안핵사 이용태가 마구잡이로 날뛰는 바람에 어그로를 잔뜩 끌어 무려 '''전주성이 함락될 정도로''' 일을 키웠으며(그나마 나중에 이용태에게 책임을 물어 잠시 유배하긴 했다.) 임오군란 역시도 마찬가지로 세도정치 시기에조차 군인에게까지 월급으로 나오는 쌀에 불량품 섞어 어그로를 끄는 짓은 안 햇다. 즉 민씨 척족이나 신 안동 김씨나 부패한 권력자라는 점은 같지만 그래도 신 안동 김씨는 최소한의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하고 권력을 다루는 요령이라도 조금 있었다면 민씨 척족은 눈치도 없고 권력을 다루는 요령도 없었다. 다만 표면적으로 보면 여흥 민씨 척족들이 단순히 명성황후의 가문이라 득세한 듯 보이나, 실상은 좀 다르다. 고종의 어머니인 흥선대원군 부인과 흥선대원군의 어머니(남연군의 부인)부터가 여흥 민씨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선택된 것도 흥선대원군의 외가이자 처가였기 때문. 참고로 여흥 민씨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왕비를 6명이나 배출한 노론 내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었다. [[인현왕후]] 민씨가 대표적이고, 순종의 첫 왕비조차도 민씨였다. 한마디로 흥선대원군 집안은 여흥 민씨와 3대, 4대에 걸쳐 혼인을 한 셈이다. 여기서 명성황후는 고아이기에 그 일가가 없으니 척신 정치는 행할 리 없을 거라는 흥선대원군의 고려가 있었던 것이다. 근데 고종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외가 쪽 친족들과 그 외 여흥 민씨 성을 가진 이들을 중용하면서, 흥선대원군의 고려는 말짱 도루묵이 된다. 애초에 흥선대원군도 신 안동 김씨를 대체하기 위해서 전주 이씨 종친[* 이른바 '선파'(璿派)]을 대거 등용했으니 김씨 세도정치를 왕족 세도정치로 대처했을 뿐이었으며,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도 이런 맥락에서 계승성(...)이 있다고 민씨의 세도정치를 옹호하려는 평가도 있으나, 전주 이씨는 외척 세력이 아닌 말 그대로 왕실 종친이었고, 흥선대원군이 이들을 통제했기에 부정부패가 난무했던 세도 정치의 비교하는 것은 넌센스다.[* 무엇보다 흥선대원군은 그래도 종친들을 어느정도 꽉잡고 있었다. 반면 고종의 경우 민씨 척족이 고삐 풀린듯이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하지도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임오군란을 유발한 민겸호의 만행에도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인사 정책은 당시 조선 정계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소론, 남인, 북인, 서북인, 영남 유림, 함경도인, 고려 왕족인 개성 왕씨까지 모조리 망라한 진정한 의미의 탕평이었고, [[전주 이씨]] 우대는 왕권 강화와 왕실 위상 증진의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니 전주 이씨 선파만을 강조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긴 하다. 대원군 집권기의 인재 상당수는 고종 초반기에 고종이 유용하게 잘 써먹었을 정도였으나 그 이후의 인물들을 보면 상당수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