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정치 === 살펴보면 세도정치 시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정도의 차이일 뿐 [[영조]], [[정조(조선)|정조]] 때도 이미 일어난 수준의 문제들이었다. 양란 이후의 모든 시기에도 민란은 꾸준히 일어났고, 《[[정감록]]》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정조 시기에 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붕당]]정치가 사실상 붕괴되고 지방 세력이 시궁창이 된 것도 이 시기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과거에 진출하는 중앙 사족과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는 지방 사족의 구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영조 시기부터 노론의 일당 독재는 오히려 강화되었으며, 정조 또한 서울 지방의 소론과 남인들을 등용하는 선에서 탕평책을 마쳐야 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고질적인 문제인 지방 차별은 해결되지 못했고, [[이인좌의 난]] 당시 경상도는 반역향으로 찍히기도 했으며, 순조 시기 [[홍경래의 난]] 또한 사전의 준비 작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작 이 두 왕 시기에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붕당정치의 마지막 체계조차 무너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다만 영조와 정조는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았기에 최소한 이를 진단하고 폐단을 고치려는 노력을 꾸준히, 그것도 조선사에 꼽힐 정도로 열심히 했다. 오히려 격동의 시기에 별 대책도 없이 조선을 쇠퇴와 멸망의 길로 몰아넣은 것이 세도정치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세도정치 시기의 조선 조정은 점증되는 외세의 위협에 대해서는 그저 '''수신하소서'''라는 말 외엔 어떤 대책도 세우지 않았으며,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인한 [[북경]] 함락 소식을 듣고도 동요하는 민심을 다독거리는커녕 '''천주교를 족칩시다'''라는 말 외에는 하지도 않았다. 이양선이 들어왔다는 장계가 올라올 때마다 무슨 녹음한 것 같이 이 두 이야기만 반복했다. 한마디로 아무 대책이 없었던 거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도 가문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공적을 부풀리기 위해 《실록》을 축소하고 은폐하며 부풀리고 과장하는 왜곡을 했다. 《수역별단》(수석 역관의 보고서), 《[[일성록]]》에는 [[아편전쟁]], [[태평천국]]운동에 대해 당시 조선 국왕들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데, 《실록》에선 누락되었다. 《철종실록》의 경우 철종 12년 3월 ~ 5월까지의 기록이 다 합쳐 '''3페이지가 채 안 된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 [[청나라]]가 곧 멸망한다는 소문이 퍼져 도성에서 도망치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고 [[일본]] [[쓰시마]]의 [[번주]]가 에도 [[막부]]의 [[로쥬]]에게 문서를 보냈을 정도인데 《실록》만 보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온한 시대로 되어 있다. 까놓고 말해서 일제가 편찬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보다도 부실하다. 게다가 조선 조정에는 당시 성리학 교조화의 병폐로 인해 내정 개혁과 부국 강병을 실천으로 옮길 인물도, 그럴 의지도, 그럴 이유도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일본의 경우 16세기 이전부터 서양과 교류하며 신 문물과 학문을 익혔으며 17세기 하세쿠라 츠네나가란 인물은 갤리선을 타고 로마 교황청을 방문해 에도 막부의 친서를 전달하고 교황청의 친서를 교환할 정도였다.[* 심지어 조선통신사가 대서양을 나라 이름 아니냐고 아는 척하자 아라이 하쿠세키라는 일본 학자는 조선에 만국전도(세계지도)도 없냐고 한 소리 하기도 했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402A_0020_010_0020|#]]] 다만 조선이 중국, 일본과 비교하면 상업이 덜 발달하고 폐쇄적인 건 맞지만 외부 세력에 완전히 무관심한 건 아니었다. 시헌력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은 중국을 통해서 서양 문명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지속하면서 시헌력의 지구설 중력 개념의 창안 등 많은 노력을 했다. <열린연단 문중양편> 참조. 일본과 비교하면 일본은 서양 언어를 배워 《해체신서》 를 만들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도 실용적인 부분에만 관심있었고, 에도 막부가 세워지자마자 조총을 버리고 쇄국정책을 시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도 서양의 자명종을 이용해 혼천 시계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처럼 서양에 완전히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사실 일본에 서양 문물이 더 잘 들어온 것도 어느 정도 일본에 대해 서양에 알려져 있었고 서양의 상인이나 전도사들이 드나들었고 또, 그러기도 쉬운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고 가본 사람도 없었거니와 일본에서도 서양이 조선에 관심을 갖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