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경제와 사회의 혼란 === 아이러니하게도 [[18세기]]에 비해 [[19세기]]는 조선의 무역에 '''좀 더 숨통이 트인 시기'''였다. [[면화]], [[고추]], [[담배]] 등의 재배가 성숙한 상태였으며, 18세기 인삼 [[종자]]의 일본 유출과 [[미국]] [[백삼]]의 수입 등으로 쇠퇴했던 [[인삼]] 무역이 [[홍삼]] 가공업의 흥성과 재배삼의 확산 등으로 인해 호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도(드라마)|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이 활동한 것도 이 시기. 이로 인해 [[은]]의 가격은 안정되었다. 한편 조선에서 공노비의 폐지([[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 왕후 김씨]] 수렴청정 시대)[* [[홍경래의 난]] 당시에 가담자 대부분을 참수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과거에는 주동자와 핵심 간부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노비로 전락시켰는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 그냥 다 처형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일부 반란군의 처형은 16세 미만 청소년 범죄자의 사형을 금한 당대 기준으로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등으로 [[노비]]가 10% 이하로 줄어들고 양반이 70%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물론 [[대구광역시|대구]]의 통계 한정이지만 아마 다른 지역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일반민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한 시기 또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시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성리학]]이 민중 사이에 보편화된 시기도 같은 시기에 걸친다. 그러나 조선 국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 농민들에 대한 수취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농민의 불만이 폭발할 지경까지 왔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악랄하게 수취한 조세가 똑바로 쓰였냐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관료와 수령과 향리들의 탐학과 횡령으로 무의미하게 낭비되었으며, 당연한 소리지만 이로 인해 국가 재정도 파탄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이었다.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느라 양민들만 죽어나가는 상황'''. 이로 인해 수탈을 못 견디고 도주하는 유랑민도 증가했기에 세금을 낼 수 있는 양민 수도 크게 감소했다. 사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공노비 해방이나 연좌제의 완화[* 이전에는 반역자 등 중범죄자의 가족들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전락시켰지만 19세기 이후에는 당사자만 처형하고 가족들은 노비 전락 없이 지방으로 추방하거나 유배하는 등 탄압이 좀 완화됐다.]도 이 과정에서 양민 수를 늘리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조선이 양란 이후 200년 넘게 평화기를 누리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한 데 반해 18세기 중엽 이후 경작지가 확장되어도 수확량의 증가는 고사하고 오히려 정체 혹은 쇠퇴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전의 3분의 1 정도로 수확량이 감소했다. 왜냐면 인구의 증가와 경작자의 확산으로 벌목과 화전을 무절제하게 하면서 전국의 산이 민둥산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규모 홍수가 일어나면서 생산량이 줄어들었던 것. 19세기 초의 실학자인 서유구는 이를 지적하여 상소를 올렸고 이를 받아들인 조정에서 소나무의 벌채를 금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행정력으로는 체계적인 산림 관리를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농업이 생업의 중심이었던 양민들로선 벌목과 화전이 생계가 달린 일인지라 반발이 컸고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계속했다. 한마디로 생계 대책도 해주지 않고 금지하니 잘될 리가 없다. 한국에서도 나무 벌채 금지가 될 수 있는 것이 나무 벌채 외에 할 수 있는 산업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삼림재건사업이 성공한 이유는 연료를 석탄과 석유로 교체하고 건물을 시멘트로 짓게 되면서 목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구 증가와 토지 생산성의 하락은 농민들의 생활을 악화시켰고, 이와 함께 유랑민의 증가와 양민의 감소로 인해 걷어들일 세금이 줄어들면서 국가 재정 또한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 악화됨으로 인해 종전까지 농민들의 생활을 보호해주던 환곡 제도는 농민을 수탈하는 제도로 변질되었고, 이로 인해 농민층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었다. 사실 19세기에 인구 증가와 토지 생산성의 한계에 따른 사회 불안은 조선 뿐만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대다수의 동아시아 국가들도 겪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기존의 생산력으로는 더 이상의 인구 부양이 불가능해진 것.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이 당시 유럽과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인도에서도 기근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사회 불안이 심해졌다. 또한 양반 계층의 폭증으로 인해 세제의 구조는 군역의 면세 계층이 납세 계층보다 훨씬 많아지는 기형적인 역피라미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세입도 줄어들었고, 이런 상황에서 환곡 제도는 재정의 곤란으로 붕괴하거나 아예 수취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도 역시 비슷하게 진행되어 청나라 때의 세율은 일종의 인두세로 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런 토지세 ↔ 인두세로의 사이클은 [[한나라]]나 [[당나라]] 등 중국사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이후 고종 시대 제법 전매를 통한 재정 충당이 보이긴 하지만 순조 ~ 철종기의 조선에서 이러한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경제적인 압력과 빈곤으로 인해 자연히 농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쌓인 끝에 폭발하여 봉기를 부르게 된다. 다만 이때의 농민 봉기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못 살겠다 갈아보자' 식의 대규모 봉기였다고 볼 수는 없다. 농민 봉기의 문제를 떠나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임금의 덕을 척신 가문과 탐학한 수령들이 가리고 있다' 는 인식이었다. 근왕 의식은 후의 [[동학농민운동]]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 때문에 농민 봉기도 수령과 향리들을 사살하여 중앙에 항의하면,[* 그렇지만 동학농민운동 이전까지만 해도 꼴랑 향리들을 죽이는 정도이고 수령은 온갖 욕보이거나 폭행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죽이지는 않았다.] 새로 도착한 수령이나 안핵사 등이 주동자 일부를 처벌하고 나머지 농민들은 대개 [[훈방]]한 뒤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수준에 그쳤다. 왜냐면 죄다 처벌하다간 진짜로 반란을 일으켜 사태가 악화되니까. 동학농민운동 때 [[이용태(1854)|이용태]]가 이렇게 하다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사태를 악화시켰다. [[홍경래의 난]]은 주동자가 뚜렷하고 목표가 중앙 조정을 겨냥한 굉장히 특이한 사례지만 이러한 구도와 해결책의 실패는 후의 [[동학농민운동]]과 [[임오군란]]에서 폭발하여 국가를 뒤흔드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사회 구조가 틀어진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후술하겠지만 반란 지도부 대부분은 양반이었다. 이런 양반들을 원국지사, 즉 ''''나라를 원망하는 선비들''''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서 배운 지식은 있는데 중앙 관직에 등용이 안 되니 출세를 못한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던 것. 게다가 이 시기의 봉기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 봉기를 지휘하는 지도부가 몰략 양반이건 토착 사회 지도층이건 '기득권층' 에 속했기 때문이다. 보통 민생고로 나라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기존의 기득권층은 국가를 지탱하기에 어지간한 경제난에도 정부가 바로 망하지는 않는데, 이 기득권층 내에서 균열이 생긴다면 정권 자체의 기반이 뿌리뽑히게 된다. 세도정치가 [[임술농민봉기|임술 농민 봉기]] 이후 몰락한 것도 진짜 이유는 바로 기득권층인 양반 사회 내에서도 세도정치 세력을 적대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지도층 내에서도 '''이제는 저들에게 권력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공통 분모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조선은 이미 미래는 없다고 봐도 된다. 실제 역대 왕조나 국가의 멸망 원인을 보면 하나같이 주요 사회 지도층의 이탈 혹은 이반이 발견된다. 사실 동학 농민 운동 이전에도 [[진주시|진주]]에서 시작된 봉기가 전라, 경상, 충청의 3남에 퍼지자 세도정치가들도 대책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세운 대책이란 게 고작 철종더러 수신에 힘쓰라는 거 정도다. 신 안동 김씨의 수장 [[김좌근]]도 풍양 조씨의 [[조두순(조선)|조두순]]도 이때는 가문을 뛰어넘어 한목소리로 말하는 [[기적]]을 보였다. 구체적인 방안을 요구하자 각지의 선비들에게 의견을 묻자는 등... 결국 철종의 주도로 삼정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문제점은 개혁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지만 농민 봉기가 잠시 수그러들자 바로 이정청을 날려버렸고, 해결된 게 없다 보니 이로 인해 농민 봉기가 다시 급증하였으며 몇 년 뒤에는 문제 해결에 나서긴 했지만 그것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마지못해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 세도 정치가들이 [[삼정의 문란]]과 농민 봉기에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대책을 낼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