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외교와 국방 === 이 당시엔 별 쓸모없어 보이는 [[종계변무]]가 이루어졌다. 원래 '''종계변무'''란 명나라 사서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간신 [[이인임]]의 자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고친 것을 말한다. 선조 때 이것이 해결되고 이후 영조 때 다시 청나라의 공식 사서 《대청회전》에 《대명회전》의 고친 것을 다시 기록하게 했다. 이는 당시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위해서 중요한 일로 취급받았지만, 철종 대에는 청나라의 이름없는 학자가 쓴 《이십일략사》의 오류를 당시 청나라에 사행사로 파견된 윤치수가 발견하여 청나라 관리에게 고쳐달라고 요구했다. 문제는 청나라 관리들조차 이런 듣보잡 역사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는 것. 그런데 윤치수는 [[베이징]]에서 이걸 30권이나 찾아내 기어이 고치게 했다. 이렇게 유능한 인재들이 어째서 국내의 현실 개혁에는 그리도 무능했을까? 어쨌든 이 공로로 철종은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길고 아름다운]] 시호를 획득하게 된다. 조선 국외의 가장 큰 위기인 [[태평천국]]과 혹시 모를 서양의 침입에 대해서도 [[뒷북]]을 치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태평천국이 가장 왕성할 때는 '광서적비', '장발적'으로 부르며 곧 진압될 것이라고 말했고, 10년이 넘도록 진압되지 않자 그제서야 위기감을 가지기 시작했으나 정작 이때 태평천국은 내전인 남경사변으로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물론 조선은 태평천국의 정보를 전적으로 청나라로 파견되는 사행사에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이들 사행사가 공간적, 시간적 제한으로 정보 수집이 힘든 건 사실이었다. 비슷한 케이스가 [[조선통신사]]에서도 종종 일어났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정보조차도 세도정치 세력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어 꾸며졌던 것이다. 특히 2차 아편 전쟁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치는 미증유의 사태가 일어나자 조선은 열하에 문안사를 파견했다. 그리고 '''문안사로 파견된 사신이 돌아와서 말하길 청나라는 땅이 넓고 변란이 없던 때가 없다며 별일 아니다고 말했다.''' 함풍제가 열하로 도망친 것도 그냥 사냥하러 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서양의 침입에 대해서는 서양이 원하는 건 교역인데 우리 조선은 찢어지게 가난하니 걔들이 올 일 없음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은 수신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다'''. 물론 전부 다 헛소리였다. 실제 함풍제는 [[영국|영]][[프랑스|불]] 연합군의 공격에 청군이 [[개발살]]나자 진짜 겁을 먹어서 열하로 도망쳤다가 거기서 나오지도 못하고 병으로 죽었고, 청나라가 변란이 잦았던 건 맞지만 19세기에는 외부에서 직접적으로 대륙을 식민지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이 전혀 다르며, 서양도 내세운 것이 말이 좋아야 교역이지 실제 목표는 척화 세력이 말한 것처럼 식민지화였다. 물론 식민지가 되는 걸 막으면서 교역을 통해 근대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게 정답이지만 이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난하기 때문에 점령이 어렵기는커녕 오히려 식민지로 만들기는 더 쉬웠고, 지정학적인 가치가 과시가 목적이라면 쓸데가 없어도 식민지를 만드는 게 당시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에 경도된 강대국들의 유행이기도 했다. 그나마 [[미국]] 정도가 식민지 개척에 관심이 덜했는데 이것도 미국의 영토가 넓고 풍요로운 땅에다 라틴 아메리카 장악이 우선이라 그냥 내버려둔 것일 뿐. 필리핀의 경우도 스페인 때려잡고 나서 얻어먹은 쪽에 가깝다. 물론 받아낸 다음에는 철저하게 수탈했다. 반항하는 필리핀도 아작내버렸고. 이게 조선이 일본이 아니라 해도 러시아나 영국, 프랑스에 의해 멸망하여 식민지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이유다. 다만 조선을 둘러싼 외국 열강들 중에서 조선을 직접적으로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나라는 일본 정도였고, 다른 서구 열강들은 거리가 너무 먼 데다 조선에 별다른 자원이 없어서 조선의 식민지화에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 조선에 직접 군대를 보내 쳐들어온 프랑스와 미국도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통상 개항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지, 조선을 완전히 점령해서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나마 서구 열강들 중에서 조선과 국경을 직접 마주한 러시아만 해도 조선을 일본과의 세력 완충지로 두려 한 정도에서 그쳤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도 조선을 식민지로 삼길 원치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국방은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문제가 많아서 졸전을 면치 못해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을 당한 중기보다 더 심해졌는데 문제를 개선할 생각은커녕 아예 무관심하여[* 정조 때의 국방 정책과 비교하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60년만에 나름대로 굳건했던 방비 체계가 허물어졌는지 기가 찰 지경...] 할 생각조차 없었다. 이러니 말기엔 조선이 2,000만명에 가까운 인구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중기와 다를 게 없이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영조와 정조 때도 국방력이 워낙 엉망이라서 박제가와 이익이 조선의 국방은 너무나 개판이라고 한탄할 정도. 당시 조선에 숨어서 선교하던 '''[[프랑스]] 신부가 조선군을 평가하길 [[방산비리|무기고에는 무기는커녕 썩고 녹슨 나무 토막 쇠 토막만 있을 뿐이니]] [[운요호 사건|군함 한 대만 끌고와서 대포 몇 방만 갈기면]] 알아서 무너질 거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결국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 탈탈 털리지만 그래도 알아서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인증하는 것을 끝으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에, 그 말은 현실이 됐다. 특히 홍경래의 난 때 발생한 반란군과 동학 농민 봉기의 동학 농민군도 진압 못하고 쩔쩔맬 정도로 [[아프가니스탄군|조선의 국방은 형편없었다]]. 동학 농민 운동 때는 경우가 심했는데 서양식 신식 무기와 훈련을 하고서도 농민군에게 패배하며 왕실의 근원지인 전주성을 빼앗기는 추태를 보여주었다. 이 상황은 제대로 된 군인인 일본군 지휘관이 조선군을 지휘하고 일본군이 지원하면서 순식간에 농민군을 학살하는 군대로 바뀌게 되지만 문제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스스로 하지 못하고 외국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것 자체가 군사력이 형편없음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이미 조선군은 재정자체가 열악해서 중앙군조차도 월급을 1년이 넘도록 받지 못해서 [[임오군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군보다 재정상황이 더 열악한 지방군의 상태는 안봐도 비디오다. 또한 임오군란으로 인해 조선군은 사실상 해체수준으로 붕괴되어버리고 새로운 신식부대는 청나라하고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바람에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다. 다만 이건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동시기 [[청나라]]의 정예군이었던 [[팔기군]]도 원래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후 [[백련교도의 난]] 진압 당시에 만주 및 몽골 팔기군의 무능과 나태가 어찌나 극심하였던지, 사천총독인 포이모 러보오(費莫 勒保)는 그 스스로도 만주족이었음에도 만몽의 팔기군에 대해 "만주족과 몽골인 군대는 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고 나태하며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綠營)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라고 악평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