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세도정치의 징조 ===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나서 집권한 서인 세력은 관직을 독점하기 위하여 반정 이후 급격한 변괴가 자주 생겨서 불안하고 의심이 된다는 이유로 가문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 즉 벌열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면서 벌열의 정치적 독점을 가속화했다. 여기에다 왕실과의 혼인은 벌열들의 세력을 확고하게 만들어줬다. '''벌열이 관직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후기에 들어와 문과 시험이 벌열에 유리하도록 실시됐기 때문이다.''' 지방 거주자들이 참여하는 정기시험인 식년과보다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특별시험인 증광시, 정시, 별시, 알성시, 춘당대시 등이 조선 후기에 크게 늘어나 전체 문과시험의 81.9%를 차지했다. 부정기시험은 급작스럽게 실시되었기 때문에 서울과 멀리 떨어진 지방 유생들은 거의 응시하지 못했으며 '''문과 급제자들의 거주지는 대부분 서울이었다.''' 여기에다 문과에 급제하면 벌열 출신들은 이른바 엘리트 코스인 사관 등의 국가 요직을 독점하면서 당상관으로 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 인조에서 고종까지의 당상관 2,758명 가운데 70.2%인 1,936명이 조선후기에 번성한 57개의 벌열가문 출신이었다, 특히 세도정치 시대인 순조에서부터 고종까지의 시기는 신 안동김씨 생해계, 반남 박씨 소계 등 노론계가 중심이 된 10대 가문이 전체 당상관 853명중 51%에 해당하는 434명을 배출했다, 조선 후기 지배집단은 대단히 폐쇄적이었던 것.[[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1997070727000401|#]]] [[숙종(조선)|숙종]]은 3차례의 [[환국(조선)|환국]]을 거친 뒤에 1694년부터 1716년까지 [[노론]]과 [[소론]]에게 관직을 골고루 제수하면서 서로를 견제시켰다. 이는 옥사로 통하여 한쪽 당파가 다른 당파를 제거하여 일당 독주로 가는 길을 막고, 옥사를 통한 리스크로 사회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세자([[경종(조선)|경종]])와 친하지 않았고, 연잉군([[영조]]), [[연령군]]과 친했다. 그러다가 1716년에 [[병신처분]]으로 권력 균형이 깨지고 노론에게 우위를 주면서 숙종은 후계자 교체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노론과 같이 1717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행한 다음에 그 구실이 생기면 바로 폐세자시킬 계획이었다. 노론이 이 계획에 동참하면서 노론이 연잉군의 줄에 섰고, 소론은 어쩔 수 없이 세자에 줄에 서서 세자를 지켰다. 그러나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에 사고를 치지 않아 노론에게 폐세자를 시킬 책모를 막았고, 여기에 숙종이 1720년에 승하하면서 노론의 폐세자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 강경파는 세를 더욱 굳혀서 연잉군을 세제로 두고 무리수까지 두면서 대리청정까지 하려고 시도했으나 경종은 연잉군에게 세제 자리를 두면서 대리청정을 시행하는 것까지를 막았다. 그러자 소론은 1721~1722년에 [[신임옥사]]로 통해 노론 강경파를 멸망 상태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경종이 1724년에 승하하고 연잉군이 등극하게 되면서 왕이 된 영조는 소론 강경파을 처음엔 어쩌지 못했지만 이의연의 상소 등을 기회로 1725년에 을사처분을 통해 소론 강경파을 털어낸다. 이에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나 노론 강경파가 소론 온건파까지 제거하려고 하자, 영조는 1727년에 [[정미환국]]을 통해 노론 강경파를 몰아내고 노론 온건파와 소론 온건파를 집권하게 했다. 한편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는 [[경종 독살설]] 을 기반으로 삼아 남인들과 손을 잡고 밀풍군 이탄을 옹립해 1728년에 난을 일으키지만 오명항 등에 패해 진압되면서 소론 강경파와 남인의 입지가 무너지고 멸망했다. 이후 영조 집권기에 소론은 [[박문수]], [[조현명]], [[송인명]], [[조재호]][* 사도세자 사후 홍봉한 등의 주장으로 사사되었다.] 등의 온건파만이 살아남는다. 한편 집권한 영조의 등극에 공이 컸던 노론은 옥사와 같은 정치 보복을 통해 세를 과시하려 하나, [[탕평책]]이라는 영조의 왕권 강화책 때문에 소론 온건파를 제거할 책모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론 강경파는 관직을 사직하고 자신들의 기반인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재야 사림 세력으로 남게 되었으며, 조정 영향력을 스스로 소멸시키면서 조정 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편 소론과 노론이 온건파만 남게 되자, 탕평책을 통한 영조의 비호 아래 노론과 소론 온건파는 점차 정권을 독점하기 시작했으며, 탕평당이라는 문벌 집단을 구축하고 장기 집권한다. 이제 조선 조정은 탕평당 출신 관리들이 관직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는 [[홍봉한]], 김한구, [[김귀주]], [[정후겸]] 등 척신들에게 권력을 몰아주게 되었다. 더군다나 노론과 소론 온건파는 당파의 의리와 시비를 형성하지 못해 결국에는 당파 자체가 의미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영조의 완론 탕평은 당파 간의 권력 투쟁을 막으면서 국가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는 측면이 있지만 붕당 정치의 가장 큰 특징인 의리와 시비를 줄이면서 결국에는 당파만의 고유한 색채를 약화시켜 세도정치의 기반을 만들어 버린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