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제도적 분석: 권력 견제 장치의 실종 === 우선 조선 왕조 정치의 대표적인 특징은 공론을 중시하는 정치이다. 사헌부의 대관과 사간원의 간관[* 여기에 더해서 홍문관의 관원까지를 '삼사'라고 한다.]을 대간, 혹은 청요직이라 해서 왕권 및 의정부와 6조를 감찰하고 탄핵하게 해서 권력의 견제 장치를 만들어놨다. 한마디로 왕권이 대신들에게 견제받고, 이들을 동시에 대간이 견제하는 체제였다. 동시에 대간이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극에서 "전하 아니되옵니다." 라고 하는 역할을 대신도 맡지만 실제론 대간이 더 많이 맡았다. 왜냐면 대신은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도''' 맡았지만 대간은 왕권과 대신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즉 견제가 대간의 존재사유이자 의무였던 것. 그런데 이 대간들이 붕당정치를 거치면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하라는 비리에 대한 폭로나 정책 비판은 하지 않고]], 증거 없이 정적을 공격하는 정치 공세, 즉 '풍문 탄핵'을 일삼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게 가능했던 까닭이 당시에는 풍문만으로 탄핵해도 처벌을 안 받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간이 원래 직무를 하지 않고 각 당의 이익만 대변하는 당론의 공격수가 되어 상대파를 공격하고 탄핵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개혁할 필요성은 이미 빠르게는 성종, 적어도 선조 대부터 지적받아오던 사항이었다. 물론 이러한 것을 옥사로 해결하면 되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내서 정치를 혼란스럽게 만들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인 중종이나 광해군은 이를 잦은 옥사로 잘 써먹으며 왕권을 강화해왔으나, 결국에는 옥사 자체가 피를 부르기 때문에 유혈 충돌로 번지게 되었고 후대에는 왕권마저 위협받게 되면서 정치 혼란만 가져왔다. 한편 [[숙종(조선)|숙종]]의 [[환국(조선)|환국]]과 [[경종(조선)|경종]] 시절에 당파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까지 경험하게 된 영조와 정조는 붕당의 폐단이 대간 그 자체에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영조 대에 청요직을 혁파하고, 정조 대에는 영조의 이러한 정책을 계승하면서 말년에는 아예 탄핵을 제한하는 금령을 설치해버렸다. 이 때문에 정조 말기로 갈수록 탄핵의 총 횟수는 계속 줄어들고 그나마 한 탄핵조차 70%가 불허당하는 상황이었다. 대간들이 정조에게 빡세게 "교육"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무슨 비판이 가능하겠는가? 특히나 정조는 조선 왕조 역대 국왕들 중에서도 가장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입 더럽기 짝이 없는 임금이라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 더러운 성질머리만 자극하고 극딜당할 우려 100%인 임금이다. 덤으로 기존 권력 구조 역시 비상 체제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임시 기구인 '''비변사'''이다. 세도가들은 기존의 의정부와 6조를 무력화하고 국가의 최고 정치 기구가 된 '''비변사'''의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의 핵심이 됐다. 이때 김조순의 처신이 대단히 기가 막혔다. 의정부와 6조 등의 정식 직함은 절대 맡지 않고, 정승들이 겸직하는 비변사 도제조도 맡지 않았지만, '''상시직인 제조를 계속 맡았다.''' 사실 이 비변사의 폐단은 이미 인조 시기에 [[최명길(조선)|최명길]]이 지적할 정도였다. 당시 세도정치기도 아닌 붕당이 나름 건전하게 돌아가던 시기에서조차 비변사의 폐단이 심했던 것. 임시직인 비변사는 이미 주요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비롯하여 행정·경제·사회 정책 등 국정의 거의 모든 부문을 장악한 상태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부터, 비변사로의 권력 집중으로 인해 [[의정부]]와 삼군부, 민정 6조(호조, 예조 등)가 집행기구로 전락하면서 계속 폐지 요구가 쏟아졌다. 현종 때부터 비변사 폐지 논의가 본격화되었으나 문제는 그 폐지 논의한 인간들이 [[환국(조선)|환국]]으로 자기들이 정권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비변사로 상대 당파를 [[숙청]]하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내로남불]] 짓거리를 200년 간이나 지속한다. 물론 비변사가 대신들의 기관인 만큼 언론 활동은 장악할 수 없었지만, 상술했다시피 이 시기에는 공론과 언론 활동이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과거 급제자들이 대간이 되기 위해서는 세도가 집에 기웃거려야 하고, 대간 가운데는 세도가의 자제들도 많았는데 누가 언론 활동을 한단 말인가? 그리고 한다고 한들, 군주가 세도가문을 박살낼 의지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최근 학설에는 세도정치에 대해서 정조의 지나친 왕권 비대화로 인해 이후의 왕이 가져야 할 견제 장치가 완전히 박살이 났고 그 결과 왕은 [[미필적 고의]]로 이 세도정치를 내버려두었다고 나오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