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도정치 (문단 편집) === 역사적 이유: 왕들의 문제 === 중국 [[후한]] 제국의 몰락과 같다.[* 후한이 몰락한 가장 큰 이유는 황제들의 잇따른 건강 악화와 요절 그리고 어린 황제의 등극이 이루어지고 환관과 외척의 발호로 황제가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정조[* 정조는 48세까지 살고 재위 기간도 24년으로 꽤 길다. 그래서 정조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단명한 왕은 아니다.] 이후 조선의 국왕과 세자들이 정치를 멀리하거나 요절하거나 건강에 문제를 겪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군약신강]] 문서에도 적혀 있지만, 조선시대에 왕이 자기 자리를 잡고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각각 10~15년 정도의 재위 기간이 필요했다. 이 기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왕이 천재거나,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 양쪽 모두에 속한 인물이 세종이다. 자기도 천재고, 집권에 걸리적거릴 수 있는 모든 방해요소를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다 치워버렸다.]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이 시기의 왕들에게는 양쪽 모두 해당사항이 없던 것이다.[* 조선에서 강대한 왕권을 누린 군주들을 보면, [[태종]]은 2회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정적들을 몰살에 가까운 수준으로 쓸어버렸고, [[세종]]은 태종의 유산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흡수했으며, [[세조]]는 태종과 비슷한 입장이다. [[연산군]]은 독재 수준의 왕권을 가지는 데 10년이 걸렸고, [[숙종]]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정통성과 함께 태종을 능가하는 정치적 식견으로 어린 시절에 자리잡았다. [[영조]]는 15년 따위(...)는 [[장수|감수할 수 있었던 입장]]이었고.] 순조는 그나마 오래 산 사례인데, 10세에 즉위해서 5년간의 수렴청정을 거쳤다. 이때 수렴청정을 한 대비가 바로 [[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김씨]]로 [[경주 김씨]]다. 게다가 순조는 친정 초기에는 적극적으로 나섰으나, [[홍경래의 난]]때 건강상 문제가 생기면서 정치에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순조가 나름 대책을 세운 것이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한지 4년도 안 되어서 20세의 나이로 요절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문제가 본격적으로 심각해진다. 건강의 악화와 세자의 죽음으로 이미 의욕을 상실한 순조는 정치 복귀를 해서도 큰 의지를 나타내지 않다가 역시 건강이 악화되어 4년 후에 죽었다. 이제 왕위는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조선)|헌종]]이 이어받게 되었다. 이때, 헌종의 나이가 8세. 조선 역사상 최연소 즉위다. 당연히 다시 수렴청정이 시작되는데, 이때 헌종의 대비는 [[신정왕후 조씨]]로 풍양 조씨이다. 하지만 순조의 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대왕대비의 위치로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신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이다. 헌종도 장성하면서부터 스스로 정치를 하려고 했으나, 2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재위기간이 14년인데, 이중 절반은 수렴청정 기간이다. 헌종이 후사도 못 남기고 사망했기 때문에, 이때 즉위하게 되는 왕이 강화도령 [[철종(조선)|철종]]이다. 당시 철종은 그나마 가까운 혈족이라는 이유로 19세에 평민처럼 살다가 갑자기 불려가서 왕이 된다. 철종은 민담처럼 글도 모르는 수준은 아니었다. 즉위한 날 대신들이 "그동안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라고 묻자 《소학》과 《통감》 1, 2권을 읽었으나 근년에는 배운 게 없고 그나마 배운 것도 잊어먹었다고 대답했다. 이 정도만 해도 문맹이 많았던 왕족 중에서는 배운 편이었던 셈. 사실 왕족들은 굳이 열심히 공부를 할 이유가 없었다. 종친들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으며 오히려 취미로 학문을 탐구한다고 해도 학문을 빌미로 왕위를 탐내는 것이 아니냐는 역모 관련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종친들은 재산이 넉넉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어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었으며, 철종처럼 가세가 몰락한 경우 생업에 종사해야 했기에 공부에 투자할 시간이 없었다. 정치적인 세력이 없기에 19세의 성인이었음에도 철종을 양자로 입양하는 형태로 왕위에 올린 순원왕후 김씨가 자신의 두 번째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이때 신 안동 김씨는 철종 비로 다시 신 안동 김씨 왕비를 밀어넣는데, 이 사람이 바로 [[철인왕후]] 김씨이다. 철종은 사회현실의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적극적으로 개혁하려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세도가에 의해 옹립된 임금이고 정통성이 취약해 국왕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줄 세력마저 부족해 개혁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의욕을 잃고 여색과 술로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으며 재위 말기에는 잔병치레로 골골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고종이 26대 왕으로 즉위하는데, 이때 대비가 된 인물이 원래라면 24대 왕으로 즉위했어야 했을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왕후 조씨]], 일명 '조대비'이다. 그래서 고종이 효명세자의 양자라는 형태로 국왕이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왕들의 잇따른 요절로 인해서 대비를 꾸준히 배출하며, 왕이 그들을 미처 견제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성립했고, 역으로 왕들이 너무 빨리 죽어서 후사도 잇지 못하는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왕권과 신권의 균형이 붕괴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