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례 (문단 편집) === 역사 === [[성경]]을 기준으로 할 때, 신약에서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해준 것이 모티브로 보이며, 초기 교회에서도 시행했던 의식으로 추정된다. 그 이전의 [[유대교]] 전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통으로, 세례는 [[세례자 요한]]이 만들어낸 것이다.[* 단, 세례라는 예식 자체는 [[바빌론 유수]] 이전에도 정결례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이것을 [[유대교]] 입교 예식으로 쓴 것은 바빌론 유수 이후 에세네파로부터였다. [[세례자 요한]]은 이것을 더 확장해서 다시 제정한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을 'John the Baptist'[* [[NRSV]]와 같은 일부 영어 성경에서는 John the Baptizer라고도 한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온전한 창작은 아닐지라도, 그로 인하여 세례가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전례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서기 50년대 후반~80년대에 [[시리아]] 지방 시골 교회에서 작성했다고 추정하는 문서 '[[디다케]]'에 세례 관련 규정이 있다. 디다케에 따르면 세례는 원래 흐르는 물에 몸을 완전히 담가 행한다. 날이 춥거나 해서 흐르는 물, 즉 강가나 시냇가에서 할 수 없다면 욕조 등에 물을 담아 거기에 몸을 담그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마저도 할 수 없다면 '''[[삼위일체론|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마에 물을 3번 부으라고 규정했다. 디다케 규정에 따르면 강이나 시냇가에서 몸을 담금이 정식이고, 나머지는 몽땅 약식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침례회]] 방식도 약식.[* 침례회에서도 강이나 시냇가에서 침례를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의 경우 예배당 안에 비치된 침례조나 목욕탕 형태로 된 별도의 침례실에서 침례를 준다. 사실상 현대의 교회들은 (특히 도시 교회들은) 강이나 시냇가를 찾는 것도 일이고 그 물이 깨끗하다는 보장이 없기에 사실상 원칙대로 하는 것은 어렵다. 심지어 침례탕을 따로 구비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개척 침례교회라든지, 혹은 군대에서 진중 침례식을 행할 때에는 침례탕이 갖춰진 다른 교회에 신세를 지거나 대중목욕탕, 영내 목욕탕을 활용하는 경우까지 있다.] 사회 제도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 특히 서유럽 일대는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래로 국가조직의 발달이 미비했으나 [[호구]]조사만큼은 잘 되었는데 이는 교회의 세례자 명단 덕택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제국]]도 미비한 행정조직을 보완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와 손잡았다. 그러나 세례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탄압을 받던 초창기 시절부터 현대까지 철칙으로 잘 지켜져온 [[7성사|성사]]라[* [[사제]]조차도 양성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탄압을 받은 [[카쿠레키리시탄]]이나, 가성직 제도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던 한국의 초기 천주교도들도 세례는 줬다.] 국가의 필요 때문에 세례가 유지되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물며 [[호구]] 조사와 세수 확보를 위해 세례를 했다는 음모론은 선후관계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헛소리다. 그래서 한자문화권 국가는 비교적 일찍 이루어진 중앙집권화로 인한 높은 행정통제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호구조사가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후대 학자들이 이 당시의 인구가 어떠한지 아는 데 있어서 추정치를 동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데 반해서,[* 예를 들어 조선은 평민들이 세금과 군역을 피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받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 호구조사에서 양반과 천민의 비중이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었고, 중국도 마찬가지로 지정은제 시행이전에는 인구조사가 철저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장거정]]이 행정력을 동원해서 세금징수를 대대적으로 해놓아서 재정을 확충해놓았지만 이 때문에 욕을 먹는 일도 있었을 정도.] 서양권은 중세와 근세의 인구수가 어떠한지 100%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정확한 인구통계 결과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정치권력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민족 왕조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함에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들은 기존 법과 제도를 지키면서 남은 관습 중의 하나가 세례였으며, 유럽 왕조들이 후대에 거대한 관료국가가 되었어도 출생과 사망, 혼인 등을 관리함은 교회의 몫이었다. [* 유럽의 역사적 인물의 경우 생일은 정확하게 찾을 수 없어도 보통 세례일자가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생년과 태어난 시기를 추정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일본]]도 종교만 다를 뿐이지 [[절(불교)|절]]과 [[신사(신토)|신사]]가 호구 조사를 담당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현대에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거나 본인을 신자라 여기지 않는 사람들도 관혼상제는 교회에서 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 서구권에서 명목상 기독교인 수(교적 보유 인구)와 실질적 기독교인 수(실제 신앙활동 인구)가 크게 차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