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조(고려) (문단 편집) == 개요 == [[통일신라]] 말기 [[개성시|송악]]군의 [[호족(한국사)|호족]]이자 '''[[고려]]의 [[창업군주]] [[태조(고려)|왕건]]의 아버지'''로서 고려의 추존 대왕. [[의조(고려)|의조 작제건]]과 원창왕후 [[저민의]]의 맏아들로 남동생으로는 왕평달과 이름이 남아있지 않는 두 명이 있고,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성씨]]는 [[왕(성씨)|왕씨]](王氏)였는데 그가 살던 시절에 이미 왕씨를 사용했는지는 미심쩍은 부분은 있으며, 이름은 처음에는 용건(龍建), 나중에 융(隆)으로 고쳤다. 그러나 [[왕건]]의 숙부이자 [[왕식렴]]의 부친인 [[왕평달]] 또한 이미 왕씨 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 후백제의 창업군주인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도 속성은 이씨(李氏)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선대부터 왕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으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오늘날 서북한 일대([[낙랑군]]과 [[대방군]] 일대)를 토대로 이후에 왕씨를 쓰는 고구려인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거문고]]를 개량한 [[왕산악]]은 물론, 고구려 시대 때 재상을 지냈던 [[왕고덕]]도 있었고,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고려(고구려) 출신 도래인의 조상으로 (고구려인인) 왕충마려, 왕중문, 왕주 등 왕씨 성을 썼던 고구려인이 언급된다. 출신 지역과 성씨, 지지 기반으로 봤을 때 아들 왕건이 고(구)려의 재건을 추구한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정황들을 통해 유추해보면 송악의 왕씨 가문이 고구려의 귀족계 왕씨 가문에서 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은 사실이나, 이들 외에도 같은 시기 강주 일대의 호족이었던 [[왕봉규]]나 이전 [[통일신라]]에서 유학자로 활동했던 [[왕거인]] 등이 있었기 때문에 속단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들 또한 마찬가지로 고구려 유민들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아내는 [[위숙왕후]] 한씨(韓氏)로 [[꿈]]에서 만나 [[결혼]]했기 때문에 '몽부인(夢夫人)'이라는 별칭이 있었으며, 자식으로 [[태조(고려)|왕건]]이 있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총서를 보면 태조가 세조의 장남(長男)이라는 표현이 있어 세조가 태조 외에도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이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 남아있는 기록에서는 세조의 자식이 태조 하나뿐이다. 사후 [[태조(고려)|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국왕으로 등극한 뒤 [[대왕]]으로 [[추존]]한 세 명의 직계 조상 중 한 명이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원렬민혜위무대왕(元烈敏惠威武大王), 자는 문명(文明).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