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조(고려) (문단 편집) == 성씨와 이름 == 일각에서는 초명인 용건(龍建)과 후명인 융(隆), 그리고 그의 부친 작제건, 아들 왕건 등의 이름들이 창업의 뜻을 너무 강하게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야 왕건 가문의 조상들이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 있지 않은 이상, 후대에 왕건이 실제 왕으로 오른 뒤에 작위적으로 조정한 느낌이 강하게 난다는 것이다. 이름도 그렇지만 [[호경(신라)|호경]]으로부터 시작되는 왕씨 집안에 얽힌 설화들은 그냥 신라 말 당대의 그럴듯한 설화들과 [[당숙종]]까지 끌어들인 잡탕으로 현대인 관점에서 보기엔 이후에 윤색한 티가 너무 난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왕륭'이 아니었는데 고려가 창업한 이후에 개명된 것이라 보는 설도 있다. 마침 성씨가 민간에 정착하기 시작하던 시기가 [[후삼국시대]]였다. 호족 세력과 개국공신들에게 한해 성씨가 본격적으로 소급되었음을 의미. 이때부터 그냥 이름 앞 글자 따와서 성으로 삼거나, 그렇게 쓰다가 나중에 다른 성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즉, 왕건도 원래 성명(姓名)이 아니라 그냥 이름(名)이었는데, 나라를 세우면서 이름의 앞 글자를 성씨로 정하고, 그 성씨를 아버지에게 [[소급]]함과 동시에 [[피휘]]를 위해 비슷한 의미의 새로운 이름을 지어 올렸다는 것이다. 이때까진 유교가 불교에 비해 그 세가 크진 못했고, 신라 왕실도 중국에서 들어온 관습인 피휘라는 개념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부 사정이 있었는지 굳이 철저히 지키려 하지는 않았다.[신라는 중기의 열조 [[원성왕]] 대까지 피휘를 하다가 말다가 한다. 일본도 잘 지켜지지는 않아서 [[헤이안 시대]]에 오오토모씨(大伴氏)가 [[준나 천황]]의 이름(오토모大伴)을 피한다고 성씨를 오오토모에서 토모伴로 바꾸기도 했다. 재미있게도 김관의의 주장과 비슷하게, 일본의 천황가는 집안 대대로 같은 이름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물론 예외도 많다), 근현대 부계 직계로 이어진 천황들은 모두 [[고카쿠 천황|도모히토]] - [[닌코 천황|아야히토]](恵仁) - [[고메이 천황|오사히토]](統仁) - [[메이지 천황|무츠히토]] - [[다이쇼 천황|요시히토]] - [[쇼와 천황|히로히토]] - [[아키히토]] - [[나루히토]] 이렇게 8대를 물려가면서 같은 히토(仁)라는 글자를 이름에 넣어 쓰고 있다(나루히토와 같은 항렬인 [[후미히토]]의 아들인 [[히사히토]]까지 합치면 9대에 달한다). 그런 세태에 중앙 귀족도 아니고 수도 [[서라벌]]에서 가장 먼 북방 변경 깡촌의 호족이 유가의 관점을 지켜가며 이름을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왕건 가문 이외에도 평주의 호족인 박직윤(朴直胤)의 아들 이름이 [[박지윤(고려)|박지윤]](朴遲胤)이고, [[아자개]](阿玆蓋)의 아들 이름이 [[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인 점 등 나말여초의 호족들이 피휘 관습에 신경을 쓰지 않은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부모의 한자를 자식이 그대로 이어받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흡사 중세 유럽이나 중동, 혹은 전국시대 일본의 작명과 유사한데 소국들이 난립한 봉건제에서 귀족들이 이름만으로도 부모가 누군지 알릴 수 있도록 비슷하게 형성되는 작명 관습이다. 현대에 유가 관점으로 볼 이유 또한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이미 [[후삼국시대]] 이전부터 [[진골]]과 [[진한 육부|6부]](이하 신라의 육두품 계층) 외에도 다른 유력 민호들 사이에서 성씨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일례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는 그 출신 성분이 [[진골]]이나 [[왕경인]]에 해당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성이 이씨(李氏)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구려|고구려계]] 호족들 가운데 [[유천궁]], [[황보제공]], [[박지윤]] 등은 이미 각자 성씨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는 다른 지방의 신라계 • 백제계 호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왕씨 집안의 배경에 대한 윤색은 있을지언정 성씨와 이름의 사용 배경에 대한 확대 해석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왕륭]]은 당대 패서 호족들 가운데서는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축에 속한 명망 높은 해상 호족이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왕씨 성을 사용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앞서 나왔듯이 고려 왕실과 고구려의 귀족 가문인 왕씨 사이의 혈연상의 친연적 연관이 제기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