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 (문단 편집) == 여담 == * 한국 최초의 이지스 [[구축함]]인 KD-3 1번함은 이 왕의 이름을 따 '''세종대왕함'''으로 명명되었으며 이후 동일함급은 [[세종대왕급 구축함]]이 된다. 이지스함 1번함에 불릴 만한 인물이라면 세종 아니면 이순신뿐이지만,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KD-2]] 구축함에 명명되면서 후속함인 KD-3 1번함에 세종이 낙점된 듯하다. 두 급의 구축함 모두 한국 해군 제7기동전단의 일원으로서 활동 중이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lBrkR4c.jpg|width=100%]]}}} || || {{{#fff '''DDG-991 세종대왕함'''}}} || * [[세종특별자치시]], [[세종과학기지]], [[세종로]], [[세종학당]], [[세종대학교]], [[세종텔레콤]] 등 세종의 이름을 붙인 고유명사가 매우 많다. 이름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 엄청나기도 하고 라틴문자로 표기하기에도 적절해서 그런 듯하다. [[인천국제공항]]도 원래 세종국제공항으로 명명하려 했으나 인천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 [[태종(조선)|태종]]이 세종에게 자신이 죽어 상을 치를 때 육식을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는 단순히 세종이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허락한 것이 아니다. 본래 유교의 [[장례]] 문화는 매우 가혹한데, 부왕이 죽어 3년상을 치르면 [[무명]] 옷을 입고, 삼시세끼 고기 없는 소식을 하는 것과 더불어 곡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 당연히 몸이 축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런 장례절차를 대부분 수일 정도로 간략화시켰다. 그러나 태종은 효심이 깊은 세종은 자신의 3년상을 정석대로 치를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태종의 형이자 고려 말에 [[태조(조선)|태조]]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 [[정종(조선)|정종]]조차 3년상을 치르며 몸이 야위었을 정도인데, 그만큼 몸이 강골이 아니었던 세종이 3년상을 치른다면 건강 악화를 버티지 못했을 건 자명했다.], 상중에 육식을 허락한다는 유언에 가까운 말을 남긴 건 자신의 장례보다는 건강하게 국사를 돌보는 것을 중요시하라는 뜻이었다. 세종과 똑닮은 아들인 [[문종(조선)|문종]]이 3년상을 줄지어 치르다 요절한 것을 보면, 이는 태종의 예리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문종은 모친상을 치른 후 얼마 안가 부친상까지 치른거라 더했다.] * 북한에서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는 근본적으로 백성들에 대한 지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세종시대에 백성에 대한 봉건적 착취는 더 심해졌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의외로 이런 시각은 일본 [[혐한]]들이나 [[뉴라이트]], [[이영훈]] 등 [[식민지 근대화론]] 학자들과 [[극과 극은 통한다|유사하다]]. 의외라고 할 수도 있지만 뉴라이트 계열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들의 해석이 의외로 비슷한 것은 크게 놀랄 일만은 아니다.[* 이영훈 계열의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식민지 근대화에 대해 객관적, 학술적인 연구를 추구했으나 가면 갈수록 조선이나 한국인들을 맹목적으로 비하하고 [[일본 제국]]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 비판받고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세종(조선)/비판과 반론]] 문서로.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아들인 [[문종(조선)|문종]]과 함께 [[명나라]]에 [[묘호]]가 통보된 단 두 명의 임금'''이다. 원래 조선은 [[명나라]], [[청나라]]와 교류할 때는 [[태조]]니 [[성종]]이니 하는 묘호 대신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시호로만 사용했다. 왜냐하면 묘호란 기본적으로 황제국에서만 사용하는 예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종(조선)|문종]]이 죽었을 때에는 대놓고 '''"[[문종(조선)|우리 왕]] 묘호 문종이라고 지었고 그 이전 [[세종(조선)|선왕]]의 묘호는 세종이었음"'''이라고 명나라에 직접 알렸다. 다만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뭔가 외교적으로 문제시되긴 했던 모양이다. * 세종 때 만들어진 여러 과학기기들이 2021년 6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피맛골 입구에서 대거 발굴되어 조선 과학사를 실증할 수 있는 주요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시계가 되는 복합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물시계의 구슬 방출장치인 주전(籌箭)도 실물로 처음 발견되었는데 이로서 관련 유물들의 정확한 복원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403228?lfrom=comment|세종대왕이 보던 밤낮 겸용 시계… 땅속서 잠을 깨다]] * 조선 왕조에서 처음으로 재위 중에 종신(終身)한 임금이다. 선대의 왕인 태조,정종,태종은 각각 왕위에 물러난 이후 종신했다. * 조선 왕조에서 처음으로 개국 이후 태어난 임금이다. 처음으로 개국 이후 태어난 세자는 형 [[양녕대군]]이었으나 결국 폐위되었다. 또한 별 다른 관직 경력 없이 성인이 되어 세자로 책봉된 조선 최초의 사례이며 이는 이후 조선 역사를 통틀어 3명[* 덕종(18세), 광해군(18세), 효종(27세)] 밖에 나오지 않은 케이스이다. 즉 세종의 세대는 고려왕조에서 관직을 경험한 1.5세대(정종, 태종)가 퇴진하고 본격적으로 개국 이후 세대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승계해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양녕대군의 막장 행보가 이를 늦추었고 그 아들인 [[문종(조선)]]까지 가서야 드디어 미성년 시절 세자로 책봉되어 즉위한 국왕이 탄생했다. * 중국의 신 [[남극장생대제]]를 존군으로 추봉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