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 (문단 편집) === 재위기간 ===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한지 두 달여 만인 태종 18년([[1418년|1418]]) [[8월 10일]] 전격적으로 양위한다. 태종은 재위 기간 수시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위]]한다는 쇼를 벌이고는 했는데[* 선위 파동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신하들은 충성심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해 숙청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그때마다 찬 바닥에서 절을 하며 말리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신하들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선위 파동이 오래 갈려나?' 했는데 태종은 세자에게 임금이 즉위식 때 입는 면복을 입혀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당연히 왕의 복장은 왕만 입을 수 있었다. 선위를 반대하여 뜰에 나아가 엎드리던 신하들도 면복 차림의 세자를 보고 군말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세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세종 4년([[1422년|1422]])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났다.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첫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그로테스크]]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했던 것인데 선위 직후 [[심온]]을 [[영의정]]과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켰다가 시답잖은 사건을 끄집어냈다. 이른바 '''강상인 사건'''으로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부분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하자 그를 친히 국문해 [[함경도]] 관노로 보냈다. 태종이 이미 "왕이 30살이 될 때까지는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를 어겼다는 죄목. 그가 태종을 아주 오랫동안 모셔온 [[공신]]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형벌이다. 한 달 뒤 심온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 이미 강상인 사건으로 [[경상도]]로 [[유배]]를 가 있었는데 이유는 병조판서였기 때문.], 이조판서 [[심정]][* 심정과 의논한 것이 왜 문제냐고 할 수 있는데 심정은 심온의 동생이었다. 세종 즉위년([[1418년|1418]])에 심정은 의흥삼군부 중군 동지총제로 [[무관]]이였고 이관은 이조참판이였다.], 동부총재 [[이관]]이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엮어냈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 죽였으며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했다. 이 때 심온은 하루에 곤장을 2번 맞고 압슬형을 5번이나 받고도 자복하지 않았다가 [[유정현]]이 "이보시오, 심공, [[답정너|당신 지위가 뭔지 알면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텐데]] 왜 [[넌씨눈|자복 안 하시오?]]"라고 하자 결국 자복했다. 유정현의 말을 듣고 심온도 처음부터 태종이 꾸민 짓임을 깨달은 모양. 심온은 다음 날 바로 [[사약]]을 마셔버렸다.[* 나중에 창작된 건지는 몰라도 세종이 왕자 시절에 튀는 행동을 자주 하자 박은이 "사위 단속 좀 하십시오." 했는데 심온이 무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사실이라면 외척에 극도로 민감한 태종의 마음을 읽지 못한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할 수 있겠다.] [[야사(역사)|야사]]에는 "앞으로 반남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박은을 두고 한 말 같다. 실제로 박은도 이 일에 유정현처럼 연루되어 있어서 심온을 경계했고 세종비인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는데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켰다. 사실 이는 명나라 눈에 불경하게 보일 수 있는 짓이었다. 나라까지 직접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을 처형해버리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만들었으니 외교상 명나라에서 불편해 할 가능성[* 현대로 비유하면 핵심 [[우방국]]의 고위 외교관이 한국을 방문해서 중요한 외교문제를 해결하고 귀국하자마자 심각한 국기문란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고 가족들도 흩어진 것이다. 단순히 의아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정도로 심대한 문제가 있는 인사를 선정해 보냈다는 소리니 엄청난 결례가 되며, 자칫 그 인사와 우리 정부 사이의 내통, 밀약 혐의라도 불거진다면 내통을 넘어 본격적인 외교분쟁으로 이어질 문제다.]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걸 보면 [[홍무제]] 이후로는 명나라의 정보력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것 같다. 홍무제의 정보력에 대해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서로. 이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은 안 하지만 상황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초기의 [[청나라]]와 대비된다.]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세종은 태종 사후 [[황희(조선)|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종과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으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들 [[문종(조선)|문종]] 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었다.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 사상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3년상 기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효 이전에 심온 본인에 대해서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온갖 병에 시달리던 세종이 아들 문종에게 양위하려고 했을 때 장인의 사면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태종이 죽을 때에 아내인 원경왕후 사망시에 고기를 못 먹어 고생하던 아들 세종을 위해서 상중(喪中)이라도 꼭 고기를 먹이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유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태종의 아들 사랑은 이만큼 각별하다. 이런 아버지의 결정을 본인이 뒤집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웠을 것이다.] 심온 옥사 재수사는 세종이 [[물갈이]]를 하기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던 정치 보복이었으나 세종은 일체의 정치 보복을 하지 않았다.[* 선왕 대의 단호한 폐비 결정으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연산군]], [[경종(조선)|경종]] 등은 어머니들을 조금이라도 복권하려고 했다. 이들은 피바람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뤄냈던 반면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정조(조선)|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복권을 관철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작게나마 복수도 행했는데 말이다. 30년간에 걸친 세종의 숙청 없는 정치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참 특이한 일이다.][* 이는 오히려 세종의 권위를 드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제든지 꺼내들 수 있는 칼을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존 대신들에게 견제가 되기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옥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박은]]은 태종이 사망하기 직전에 병사했는데 사후 관직 박탈과 같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 심온에게 자복을 받아내고 심온 일가의 처벌뿐만 아니라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했던 유정현도 계속 [[좌의정]]으로 일하며 국가의 [[재정]] 분야의 일을 하면서 궤장까지 받는 명예를 얻었으며 72세가 되어서야 은퇴해서 곧 자연사했다. 다만 그 때문에 소헌왕후는 개인적으로 고생했을 가능성이 큰데 심지어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소헌왕후 본인은 [[임산부]][* 4남 [[임영대군]]을 임신 중]였으며 죽을 때까지 아버지가 신원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문종이 심온을 사면시킨 것도 이같은 어머니의 마음 고생을 보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 세종이 아버지에게서 어보를 받고 즉위했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은 세종 4년([[1422년|1422]])에 숨을 거두었지만, 아직 조선 조정은 온전히 세종의 것이라고 하기엔 일렀다. 태종은 죽었으나 아직 조정에는 태종 때의 사람들뿐. 세종 4년(1422) 당시 영의정 [[유정현]][* 태종의 뜻에 따라 충녕대군을 세자에 책봉토록 건의했던 인물.], [[좌의정]] [[이원]][* 제2차 왕자의 난 공신(좌명 4등).], [[우의정]] [[정탁]][* 제1차 왕자의 난 공신(정사 2등).],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호조판서 [[이지강]] 등 주변에는 태종의 사람들만 있었다. 이 신하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으려는 의도였는지 세종의 말에 따르지를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일을 진행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대표적인 일이 폐세자 양녕대군에 관한 일. 태종의 상을 치르기 위해 유배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양녕대군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내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려댄다. 이때 내용 중에는 "양녕대군의 거취는 신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있었다. 양녕대군의 일은 자기들이 태종에게 위임받았으니 지금 왕이라도 간섭하지 말라는 소리다. 이러한 상소가 줄을 잇자 세종은 [[상소]]를 던지기도 하고 무시도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못 이겨 양녕대군을 내보내게 된다. >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했구나. >----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2월 27일 병자. 즉위 초의 상황은 세종이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는 험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중 세종에게 1가지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소위 말하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 [[서울시립대]] [[사학과]] 이익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시즌 2 155회에서 이 사건을 가리켜 "[[고려]]의 정치 체계에서 [[조선]]의 정치 체계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라 평한다.]이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양인]] 426명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고, 당시의 권문세가 [[임견미]]에게 뇌물을 바쳐 이를 허용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왔는데, 조선조에 들어와 아들 김도련이 노비 426명과 그 자손들까지 거의 천 명을 자기 소유 노비로 되찾겠다고 한 일이다. 김도련이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어 큰 문제가 되었다. 노비를 무려 36구나 뇌물로 받아 뇌물 스캔들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떠오른 병조판서 [[조말생]]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ㆍ우의정ㆍ좌의정ㆍ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연루되었고 이 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口: 노비를 세는 단위). 가히 조선 초기 최고의 뇌물 스캔들이라 할 만했다. 당시 노비 1구당 현재 가치로 천만 원 정도[* 노비 1명당 말 1필과 가치가 비슷했다고 본다.]였고 노비도 사람인지라 자손을 낳으면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니 뇌물 스캔들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때는 재위 4년(1422)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으나 4년 뒤(1426)에 사헌부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도록 명한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났으며 이 때 조말생이 노비 36명에 장물 780관, 현재 가치로 약 14억 원 남짓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말생은 [[교형]]을 받을 뻔했으나 유배로 그치게 된다.[* 조금 더 말하자면 유배에서도 금방 풀려나지만 그때부터 조말생에 대한 진정한 처벌이 시작되었다. 십수 차례 사직서도 전부 불허되면서 일하고 또 일하다가 늙어 죽은 것이다.] 관리 17명이 노비 132명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드러나자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렸다. 이로 인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듬해 1427년(세종 9년) 1월 [[황희(조선)|황희]]를 [[좌의정]], [[맹사성]]을 [[우의정]]으로 승진시키면서 세종은 본격적으로 [[성군]]으로서 행보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재위기간은 그야말로 업적의 향연이었다. 세종 8년(1426년) 2월 [[한양 대화재]]가 발생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하기는 했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조선 500년 동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난 중 한양을 가장 크게 파괴한 재난이었다. 시작은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2015_003|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 한성의 시전을 관리하는 관청.]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문종(조선)|세자]]는 군사훈련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군|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총괄했는데 [[금성대군]][* 금성대군은 1426년 3월 28일에 태어났으므로 이 때 소헌왕후는 말 그대로 만삭이었다.]을 [[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즉위식도 만삭인 채로 치뤘다. 소헌왕후가 애를 많이 낳기는 했다. 실제로 조선 때에도 세종을 제일 [[명군]]으로 보았는데 최고의 [[왕비]] 역시 소헌왕후로 보았다.] 다음 날인 16일에는 전옥서[* 감옥과 죄수들을 관리하는 관청]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양에 돌아와서 아내와 교대해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 [[한국사]] 최초의 [[소방서]]][* 소방관은 금화군, 물을 길어나르는 인원을 급수비라 명명하며 금화도감에 소속시켰다. 이후 [[인조]]가 필요없다는 이유로 폐지했다.]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붙어있는 가옥을 적당히 이격시켜 다시 짓도록 조치함과 아울러 그 사이마다 우물을 파서 화재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한양의 도시 구조를 바꿔놓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yGpBsJT_UTc|#]] 재위 9년(1427) 5월 [[박연]]이 [[경기도]] [[남양읍|남양]]에서 나는 옥으로 [[편경]]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편경은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는데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다. 9월 어린 왕족들의 교육을 위하여 종학(宗學)을 세웠다. 교육 내용이나 수준은 [[성균관]]과 비슷했으리라 추측한다. 재위 11년(1429) 2월 주종소를 설치하여 [[편종]]을 법식대로 만들게 했다. 5월 [[정초]]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6월 돌을 던지는 군사인석척군을 폐지하고 [[단오]] 때 행해졌던 돌 던지는 놀이인 [[석전|석척희]]를 금지했다. 7월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재위 12년(1430) 2월 농사직설을 반포했다. 10월 공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법을 제정했다. 11월 등에 매질을 가하는 편배를 금지했다. 청동 [[활자]]인 계미자가 고르지 못함을 인식하여 재위 2년(1420) 경자자, 재위 16년(1434) 갑인자, 재위 18년(1436) 병진자 등을 주조해 활판 [[인쇄]] 기술을 더욱 발전케 했다. 재위 19년(1437) [[장영실]], [[이천(조선)|이천]] 등에게 지시해 [[앙부일구]], [[자격루]]를 만들도록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