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굉 (문단 편집) == 생애 == 473년 소순지와 진씨(陳氏)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 신장이 8척으로, 수염과 눈썹이 아름다웠으며 몸가짐이 단정했다. 492년, 소굉은 [[제(남조)|남제]]에서 여릉왕부 법조행참군으로 임명되었고 태자사인으로 직위를 옮긴다. 495년, [[북위]]의 군대가 소굉의 형인 장사왕 소의가 진수한 양주(梁州)를 포위한다. 소굉은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양주를 구원하러 갔으나, 소의는 이미 북위의 군대를 격퇴하였다. 소굉은 이후 진안왕부 주부, 계양왕부 공조사를 역임하였다. 소굉의 형인 형양왕 소창이 시안왕 소요광으로부터 예우를 받았는데, 499년 소요광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소창을 핍박하여 남제의 수도인 건강으로 가도록 부추긴다. 당시 소연은 아우들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하여 소굉은 사리에 밝으니 반드시 황제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며 당시 같이 있었던 남강왕 소위를 안심시켰다. 501년, 소연이 거병하자, 소굉은 신림(新林)에 당도하여 소연의 군대를 맞이하였고 보국장군으로 임명된다. 수도 건강이 평정되자 소굉은 서중랑장, 중호군으로 임명되었고, 석두수군사를 겸임하였다. 502년 소연이 남제의 마지막 황제인 [[화제(남제)|화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고 양나라를 건국하니, 이가 양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양)|양무제]]이다. 소굉은 양나라가 건국되자마자 임천왕으로 책봉되었고, 사지절, 산기상시, 도독양남서주제군사, 후장군, 양주(揚州) 자사가 되었다. 504년에는 시중이 되고 중군장군으로 진호되었다. 505년, 무제가 북벌을 결의하면서 소굉은 도독남북연북서청기예사곽8주북토제군사로 임명되었다. 소굉의 군대는 낙구(洛口)에 당도하여 선봉대가 북위의 양성(梁城)에서 승리하고 위나라 장수인 조청(鼂清)을 죽였다. 이후 북벌이 길어지면서 소굉의 군대는 양나라로 되돌아온다. 507년, 소굉은 표기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임명되었고, 예전과 같이 시중이 되었고, 사도로 승진하였으며, 태자태부를 겸임하였다. 509년, 사지절, 도독양남서2주제군사, 사공, 양주 자사로 임명되었다가, 표기대장군으로 좌천되고 개부의동삼사와 시중을 그대로 받았다. 516년, 소굉의 생모인 태비 진씨가 죽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중서감으로 복귀하였고 표기대장군, 사지절, 도독 등의 직위를 예전과 같이 받았다. 518년에는 중군장군으로 좌천되었다가, 520년에는 사지절, 도독양남서주제군사, 태위, 양주 자사로 옮겼고, 521년에는 기부상서를 겸임하였다. 소굉은 526년에 사망하여 정혜(靖惠)라는 시호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