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 (문단 편집) === 정권별 특성 === 혁명기에는 엄청난 사회, 경제적 혼란과 내전으로 인해 많은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국을 떠났고 이념적인 문제로 소련 정권이 세계적인 학자들을 추방하거나, 쏴 죽이기도 했다. 화학자인 티히빈스키가 이 시기에 총살당한 대표적인 과학자이다. 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에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여 수많은 연구 기관을 설립하고 과학 인력을 수급하는 한편, 해외로부터 기술과 기계를 구매하고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를 통해 서방 과학계가 이뤄낸 성과와 새로운 지식들을 확보했다. 또한 비밀 유지와 집중적인 연구 발전을 위해 과학 도시인 나우코그라드(наукоград)를 건설해 과학자들을 이주시키고 도시민들에게는 좋은 인프라와 대우를 제공했다.[* 나우코그라드를 죄다 비밀 도시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이는 소련의 비밀 도시와 과학 도시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오류이다. 과학 도시들은 일부만이 비밀 도시였고 상당수 과학 도시가 다른 도시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곳들이었다.] 전시에는 랜드리스도 과학 기술에 도움을 주었다. 신경제 정책 시기부터 5개년 계획 시기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과학, 산업, 군사 분야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미국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 막대한 물자와 장비, 설비, 기계들을 제공하고 소련 과학자와 기술자, 관료들의 미국 견학도 허용해 주었다. 소련은 미국이 제공해 준 설비와 기계들을 뜯어 연구하고 미국이 제공해 준 과학 기술들을 활용해 자국의 과학 발전에 써먹었다. 클라우스 푹스 같은 스파이들이 제공해 준 기밀, 소련에 우호적이던 미국 과학자들이 해준 조언들도 소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재원을 투입하고 교육에 힘써도, 우수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혁명기에 고향을 떠난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좋은 대우와 높은 보수를 조건으로 귀국을 요청해 해외 과학의 성과와 유능한 과학 · 기술 인력들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소련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인재의 육성을 꾀했다. 예를 들어, 귀국한 카피차가 물리학 교육의 중요성과 독립적인 물리학 대학의 설립을 요청한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내 모스크바 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되기도 했으며 이 밖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연방 정부에 과학 교육과 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 과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강조하는 한편,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만, 이념과 스탈린의 편집증 문제로 인해 과학계는 인문학계가 당했던 것처럼 대숙청과 당의 간섭에 큰 수난을 치러야 했다. 국가의 중요한 재원을 쓸모 없는 곳에 써댄다고 의심하거나 서방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니콜라이 바빌로프 같은 세계 최고의 유전학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코롤료프 같은 천재가 굴라그로 끌려가 고생했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굴라그에 있는 과학자 - 기술자 전용 수용소인 샤라쉬카에 갇혀 당의 지시에 따라 원치 않는 연구와 노동을 해야 했다. 굴라그에 끌려가진 않더라도 카피차처럼 고국에 귀향했다가 억류당해 수십 년 동안 출국을 못하고 소련에 갇혀 살아야 했던 이들도 있었고[* 스탈린은 카피차가 원하는 것이라면 거의 다 들어주었지만, 출국만큼은 끝까지 막았다.] 베냐민 세묘노프 같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스탈린의 경제 정책을 반박한다는 이유로 연구 성과가 비공개 처리되거나 침묵을 요구받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람진처럼 공업당 사건 같은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숙청당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대중들이 주목하거나 불만이 터지면, 중간 관리직이나 기술자, 과학자, 학자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많았으며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도 이들을 희생시켰다.] 게다가 정권에 기생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과학 이론을 내놓아 과학계에서 권력을 누린 트로핌 리센코 같은 사이비 과학자들이 소련 과학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들을 만들고 뛰어난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위 문단의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말할 것도 없고, 세례브로프스키, 코리초프 등의 생물학자, 유전학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리센코와 그 도당은 스탈린이 죽고 정치 · 사회적 통제가 완화되자, 울분이 터진 과학계가 '300인의 편지'로 대표되는 집단 행동을 통해 실각시켰으나, 리센코는 흐루쇼프에 아부하고 그의 호의를 사서 기어코 과학계에 복귀해 권력을 잡았다. 돌아온 리센코는 흐루쇼프 정권 동안 소련의 농업과 유전학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런 정치계의 탄압과 사이비 과학자들의 난행 외에도 전쟁이 과학계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1차적으로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많은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국을 떠나거나 죽었고, 혁명과 내전의 상처가 회복된 뒤에는 대조국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파괴와 죽음이 발생했던 대조국 전쟁의 참화가 과학계를 덮친 것이다. 위 문단의 베냐민 세묘노프와 그 형 안드레이 세묘노프가 레닌그라드에서 죽음을 맞았고,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학자들 또한 종자를 지키다 아사했다. 이 밖에도 많은 숫자의 학자와 기술자, 이공계 학생들이 아사하고 동사했으며 독일군에게 피살당하거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다만, 모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탄압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세묘노프 - 텐샨 가문이나 바빌로프 가문처럼 러시아가 자랑하는 과학자 가문 같은 경우에는 그 영향력과 업적이 대단했기 때문에 그 스탈린도 적당히 제재를 가하는 수준에서 끝내거나 아예 처벌을 면해 주었다. 파블로프 같은 경우에도 당사자는 소련 정권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소련은 멸망하는 그 날까지 파블로프와 그가 이뤄낸 업적을 받들어 모셨다. 광물학자인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는 입헌민주당 당 중앙위 위원 출신에 임시 정부에서 교육부 차관을 역임하는 등 그야말로 '핵심 반동'이고 그 아들인 역사학자 게오르기 베르나드스키는 백군을 따라 크림 반도로 가서 브랑겔과 협력했다가 그와 함께 이스탄불로 떠난 자였다. 부자가 반동 중의 반동인데도 스탈린은 베르나드스키를 과학계의 원로로 대접했다. 스탈린이 베르나드스키에게 가한 제재는 그의 망명을 저지하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를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다만,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는 혁명 초기에 과거 이력 때문에 숙청당할 뻔했는데, 그를 사면해 달라는 탄원이 너무 많아서 혁명 정부에서 풀어주었다.] 그밖에도 러시아의 많은 과학자들이 숙청을 피하거나 적당히 견책, 좌천만 받는 수준으로 처벌을 끝내기도 했다. 소련에서 늘 차별받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유대인 같은 경우에도 과학자들은 상당수가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전시의 소련 정부는 어떻게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래서 베어마흐트가 도시를 포격하고, 루프트바페가 폭격을 하는 와중에도 중요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나 기차에 실어 후방으로 이송했고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세묘노프 형제의 경우에도 정부의 후방 이송 요구를 거절하고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다 죽은 것이었다. 전후 소련의 과학계는 스탈린 정권이 양적인 확대를 이뤄낸 것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부족했다는 점과 과학계에 가한 간섭과 숙청, 리센코 같은 사이비 과학자들을 중용한 것을 비판했다. 경제적으로도 스탈린 정권은 소련을 거대한 산업 국가로 변화시키긴 했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개발한 기계와 기술을 활용하기 보다는 인력 동원에 치중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카피차가 소련을 '머리는 조그마한데 몸집은 거대한 공룡'에 비유할 정도였다. 흐루쇼프 정권은 과학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 기관 간의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확대, 개선했으며 경제성 원칙에 입각하여 연구 과제와 사업을 선정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업과 연구 기관 간의 계약 연구 제도를 도입하고 연구소의 독립 채산제를 유도하여 총 연구 기관의 25%를 독립 채산제로 의무 운영하게 했다. 흐루쇼프 정권은 군사와 우주 항공 과학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전략적인 기획을 수립하여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 또한 기초 과학과 자연 과학의 성장과 고급 과학 인력의 육성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소련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내었고, 농업 발전을 위해 도시의 농업 연구소들을 농촌 지역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군사, 핵물리학, 우주 항공 과학 분야에서 이룬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 정권의 개혁은 경제적 효과가 크지 않았다. 계약 연구 제도와 연구소의 재정적 자립을 꾀하는 독립 채산제는 연구 기관들이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소형 과제에 치중하게 만들어 기술 혁신을 주도할 대형 장기 연구 과제의 수행이 급감했다. 경제성을 중점에 둔 연구 과제 선정과 인센티브 제도는 미래에 연구가 만들어 낼 성과의 정량 분석이 어려워서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농촌 지역으로 이전된 농업 연구소들도 계획한 것에 비해 성과가 낮았고, 연구 성과를 이뤄내는 속도도 예상보다 느렸다. 흐루쇼프 정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가 크게 줄어들어 소련 과학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오테펠(оттепель. 해빙)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통제가 완화되고 자유화가 진전된 흐루쇼프 시기였지만, 정보 확산에 통제는 계속되었다. 이 통제는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공개)가 이뤄지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1968년,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리베르만 - 코시긴 개혁의 경제 개혁 원칙을 과학계에도 도입했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흐루쇼프 정권이 받은 비판을 수용해 대형 장기 과제에 대한 연구를 각 연구 기관들에게 지시하고 미래 예측 기법을 도입해 연구 사업의 기획 기능을 강화했다. 그리고 HПO[* Научно-производственное объединение. 과학 생산 협회. 영문 : SPA. SCIENCE PRODUCTION ASSOCIATION]를 세워 연구 - 개발 - 생산의 연계를 도모하려 했다. 1980년까지 250개가 설립된 HПO는 연구와 생산을 통합하고, 연구 기관과 설계국에서 기업이 보유한 생산 설비와 기술력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를 내놓아서 기껏 개발한 설계와 기술이 현장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거나 생산이 지연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설계국과 생산 기업 간의 기술 격차를 해소할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각 산업 부처 별로 연구 지원금 제도를 실시해 부처들이 자율적으로 연구 기관에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게 하고 흐루쇼프 정권이 제정한 경제성에 주안점을 둔 인센티브 지급 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 덕분에 소련의 연구 기획 능력이 개선되었고, 연구 사업을 대형화시킨 것은 연구의 효율성을 제고했다. 그러나 기술 개발 과정에서는 연구 기관 간에, 기술 개발 단계 별로는 관련 부처, 연구 기관, 생산 기업 간의 협력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1983년, 과학 기술 위원회의 권한을 확대하여 연구 관계 부처들에 대한 조정권을 강화하고 HПO 제도도 개선했다. 대형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서방의 연구 사업단 개념을 도입하고 전용 연구 시설을 제공했으며 목적 지향적인 연구 기획 능력의 강화, 우선 순위에 따른 집중적인 예산 지원, 연구 성과와 품질에 따른 가격 제도의 도입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소련 과학 기술의 발전은 침체되었다. 소련은 1961 ~ 65년까지 연평균 4600개의 신기술 모형을 개발했지만, 1981 ~ 85년 동안에는 3500개로 줄어들었고 그 중에서 10% 정도만이 세계 수준을 상회했다.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과학계는 세계적인 수준에 있던 연구 & 개발 분야에서의 위상을 잃고 점차 쇠퇴해 갔던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상기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 신기술 개발의 속도와 양은 줄어들었고 그 수준도 세계 평균을 넘는 것이 많지 않았다. ГОСТ 규격에 맞춰 생산한 소련산 공산품들 중에서 ISO 규격의 수준에 맞는 게 극히 드물어서 연방 정부에서 제품 규격 평가 기준을 완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던 철강 기술도 뒤쳐졌다. 80년대 소련의 발전소 열 효율은 일본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었고 고로 1기당 연평균 선철 생산량도 일본의 40% 정도 수준이었다. 그래도 고로의 이용 계수와 코크스비는 아주 좋은 편이었지만, 우수한 고로의 보급이 잘 안 되고 노후화된 설비가 많아 설비 보수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 정권은 기존 정권들의 개혁 노선을 따르면서 계획 관리 체제와 연구 과제의 예측 능력의 개선, 연구 기관 간의 경쟁 확대, 노후 설비의 교체와 최신 설비의 도입, 인재 육성, 중요 연구 과제에 대한 집중 투자를 추진하는 한편, 연구 기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완화하고 연구 기관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을 대량으로 채용하고 고령의 연구원들은 과학 자문 기관으로 보내는 인사 정책의 쇄신도 추진했고 과학 생산 조합의 설립도 장려했다. 과학계와 산업계 간의 연계도 계속 강화되어서 대학의 연구 및 개발 사업은 80% 이상이 기업과의 계약에 따라 수행되었다. 소련은 인력, 투자면에서 방대한 연구 기반을 구축했으나, 과학 기술과 경제의 연계성 부족, 과학 기술 연구에 대한 인센티브 부족, 중앙 통제에 따른 정보 확산의 인위적 통제, 낮은 컴퓨터 보급률 때문에 발생한 정보 유통 체제의 미비,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 부족 등 다양한 문제점들 때문에 막대한 재원과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을 통해 만들어낸 거대한 국가 연구 개발 체제가 가진 잠재력을 완전하게 이끌어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 후반부터 침체에 접어들었다. 또한 [[미국]]과 [[유럽]]에서 매우 발전되어 있던 분야인 [[전자공학]]과 [[정보통신공학]] 분야에서는 그다지 성과가 좋지 못했고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의 경제 침체와 투자 감소는 소련 과학의 쇠퇴를 야기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에는 그 쇠퇴가 정점에 달해서 3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해외로 이주하고, CIS 국가에 남은 과학자와 기술자들도 고난을 겪었다. 그래서 러시아 연방의 과학은 매우 침체된 상태다.[* 소련 최고의 수학자가 연방 해체 후에 생계가 어려워져서 화장실을 숙소로 쓰면서 살다 변기에 앉은 채로 아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보다 여건이 나은 과학자들도 제대로 된 연구와 학술 활동을 하기는커녕,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