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 (문단 편집) === 주거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아파트)] 소련의 주거 문화는 아파트가 주류였다. 시골과 소도시의 경우에는 단독 주택에서 거주하는 경우도 꽤 있었지만, 대도시의 경우에는 아파트가 지배적이었다. 노동자의 나라를 천명한 소련은 건국 초기부터 주거 문제를 겪었다. 내전으로 인해 주거지와 인프라가 파괴되고 무수히 많은 피난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정 시절부터 러시아의 주거 환경은 심각하게 좋지 못했다. 제정 시절의 러시아 노동자들은 합숙소, 공장 기숙사, 아르텔[*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방 한 칸을 빌려 생활하는 구조], 아파트에서 거주했는데, 그 주거 환경은 대단히 끔찍했다. 첫 번째, 합숙소는 세기 전환기 기준으로 합숙소 이용객 1인당 평균 사용 가능 면적의 너비가 35.5cm, 공역은 4.9㎥(3 제곱미터) 미만으로 겨우 차렷 자세로 서 있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만 허용될 정도로 인구 밀도가 과밀했다. 건물 내부의 위생은 심각하고 공기는 항상 탁했으며 땀 냄새와 담배 연기가 방을 가득 매워 호흡도 힘들었다. 합숙소 거주자의 증언에 따르면, 10 ~ 15분만 내부에 있어도 현기증을 느낄 수 있으며 합숙소에서 숙면을 취하면 질식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 깊게 잠들면 안 된다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합숙소의 투숙객들은 밤마다 최소 3번 이상 복도나 건물 바깥으로 나가서 신체에 산소를 공급했다. 두 번째, 공장 기숙사의 경우에는 브라노벨, 코노발로프, 모로조프 재벌처럼 인간적이고 동정심이 넘치는 경영주가 운영하는 기업에서는 아예 제대로 된 노동자 주택 단지와 각종 시설들을 건설하고 다양한 복지를 제공했으며, 일부 인간적인 자본가들도 그럭저럭 괜찮은 기숙사를 제공하거나 기숙사를 지어주지 않는 대신에 주택 수당을 지급했다. 질적 수준이 나빴던 기숙사들도 점차 개선이 이뤄져서 모스크바의 대기업인 프로호로프 재벌처럼 나무 판자 침대를 매트리스가 있는 철제 침대로 교체하고 각종 가구도 비치했으며 노동자 가정은 가족 기숙사에 수용하는 기업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러나, 상당수의 공장 기숙사들은 그 질적 수준이 심각할 정도로 나빴다. 군대 내무반처럼 나무 침상을 깔고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일렬로 누워 자게 한다거나, 중앙 산업 지구[*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러시아 중부 지역]에서는 벌레가 들끓고 빛도 제대로 안 드는 방에 1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집어 넣고 침구도 없이 2층짜리 평상에 누워 자게 하는 기업들도 있었다. 돈바스의 탄광이나 철도 건설 현장의 '땅굴 막사'는 창문도 없고 라스푸티차와 우기가 되면 바닥이 물로 가득 차는 10평짜리 방에 60명씩 집어넣었다. 가정을 이룬 노동자들은 '운이 좋다면' 1실 2가구로 방을 배정받을 수도 있었지만, 운이 좋지 못하면 나치가 운영한 수용소처럼 부부가 다른 건물에 수용되었다. 운이 좋아서 가족용 기숙사를 배정받아도 다른 가족과 공유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가족 간의 성생활까지도 공개되었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노동자 가정에서는 침대를 커튼으로 가렸지만, 여유가 없다면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세 번째, 일부 여유 있는 노동자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방 한 칸이나 아파트 한 채에 공동 주거를 하던 아르텔의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아파트도 사정은 좋지 못했다. 화장실의 오물이 복도 천장과 벽면을 타고 복도 바닥에 스며든다거나, 아파트 바깥의 공용 화장실과 내부 공용 화장실의 악취가 융합되어 새로운 악취가 만들어질 정도로 위생이 나빴다. 휴식을 취하고 싶어도 아파트를 작업장으로 쓰는 이들이 있어 제대로 방음이 안 되는 벽면을 타고 기계음과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아파트 호실마다 환경이 제각각이어서 같은 건물 안에서도 추위와 더위, 습도가 제각각이었고 그 중에서도 지하 층은 환기가 불가능하고 극도로 어둡고 더러웠다. 심지어 비나 눈이 오고 라스푸티차가 터지면 거리의 오물과 빗물, 눈 녹은 물들이 섞여서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지하 층은 마치 이집트의 나일 강처럼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수준이었고 1년 전에 고인 물이 그 다음해에 그대로 고여 있는 일도 있었다. 인구 과밀도 심각했다. 세기 전환기의 모스크바에서는 15평 아파트에 11명이 거주하는 일도 있었고 1904년의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투 룸에 15명이 거주하거나, 방 하나에 10 ~ 20명이 거주하는 일도 있었다. 모스크바의 집값, 집세는 서유럽에서 가장 집값과 집세가 비싼 베를린보다 더 높았다. 이러한 인구 과밀은 심각한 주거난과 건물주들이 집세를 받기 위해 한계까지 임차인을 받고 하나의 방을 여러 개의 간이 방으로 쪼개서 임대한 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 수뇌부들은 귀족과 부르주아, 건물주들로부터 주택을 몰수해 노동자들에게 분배하여 주거난을 완화하고 새로운 주택들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도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는 공산주의는 개조인 앵겔스부터 도시 문제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비판해 왔기 때문이었다. 밧줄에 매달리거나 벤치에 앉아서 잠들고, 관짝에 누워 자는 게 호사일 정도로 심각한 주거난, 깨끗한 물과 공기를 구하기도 힘든 위생, 부족한 식량과 공공 서비스 등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겪는 고통은 공산주의자들이 결코 좌시할 수가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소련 수뇌부들은 노동자들을 도시 문제에서 해방한다는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 다양한 의제들을 논의하고 건축가들을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과 건축가, 행정가들 사이에서 엄청난 격론이 일어났다. 도시의 규모와 형태, 주택과 녹지의 배치, 상공업 지구의 편성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서로 다른 의견들이 쏟아졌고 도시화를 부정하고 도시 그 자체를 없애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나왔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일명 코무날카라 불리는 공용주택이 지배적이라 한 가정에 방 하나를 쓰는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혁명 직후 귀족들이 버리고 간 대주택 안에 여러 가구가 방을 배정받은 경우도 흔했다.] [[흐루쇼프]] 이후로는 한 가구 당 한 주택이 기본이 되었다. 다만 흐루쇼프 정부부터 체르넨코 정부까지도 1980년 올림픽 때까지 1가구 1아파트를 목적으로 아파트 건설사업을 꾸준히 이어왔고, 흐루쇼프때 1가구 1방짜리 아파트에서 브레즈네프 정부 때는 1가구 3방짜리 아파트가 보편화되는 등 주거환경도 점차 나아졌지만, 핵가족화로 가구수 증가율이 인구증가율을 초과하면서 주택을 배급받기 위해 몇년씩 기다리는것은 여전해서, 1980년대 중반 기준으로 주택보급률은 85% 정도로 아파트를 받기 위해 공동아파트나 단칸방에서 살며 대기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상당수 존재했다. 고르바초프 집권기 때는 주택보급기간을 최소한을 줄이기 위한 1가구 1아파트 주택건설계획을 세웠지만, 소련 해체로 주택을 무상으로 받는 제도가 사라지면서[* 다만 러시아 공무원들은 주택을 여전히 무상으로 받으며, 일정기간이 지나면 자기 소유로 만드는것도 가능하다. 러시아의 공무원 급여수준이 일반 사기업보다 낮아 부정부패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평을 듣는데, 공무원들의 부정부패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공무원들의 실질 급여를 높이기 위해 무상아파트 배급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것이다.] 돈없는 빈민층의 주거환경은 도로 열악해지고, 신혼부부들도 무상아파트를 못 얻게되면서 상속에 기대는 경우가 태반이 되었다. 소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처럼 개인이 자유롭게 주택을 사고 팔 수 없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개인이 주택조합을 통해 주택을 구매[* 정확히는 해당 주택에 영구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거주권을 구매하는 형태였다. 오늘날 [[중국]]과 비슷하게, 소련에서 모든 토지 및 부동산은 원칙적으로 '''국가'''에 귀속되었다.]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일반적인 급여수준에 비하여 비싼 편이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 당시 단칸방 아파트의 가격이 대략 6,000루블에서 7,000루블 정도였다. 방이 3개 있는 아파트의 경우 약 10,000루블 정도에 달했다. 당시 노동자 평균 월급이 150에서 200루블 정도였다는 걸 감안했을 때, 일반적인 노동자가 오랫동안 일해도 쉽게 구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https://www.rbth.com/history/333815-soviet-apartment-buy|(출처) Could ordinary Soviet people buy themselves an apartment? (영어)]]]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장시간 공용아파트나 단칸방, 또는 다락방이나 기존에 가족들과 살던 집[* 이 때문에 서구권에서는 보통 자녀가 성인이 될 경우 독립하여 분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소련에서는 주택문제로 인하여 집을 구하기 여의치 않을 경우 [[미혼]]인 성인자녀가 부모와 계속 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에 거주하면서 국가로부터 집이 나오길 기다렸다. 보통은 기숙사나 주택 또는 관사를 제공하는 직장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전문직종에 종사하면서 자녀가 있을 경우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선적으로 배급되었다. 또한 거주 이전도 자유롭지 않아[* 중국의 [[호적|후커우]] 제도와 비슷하게, 소련에서는 거주지 등록제도를 이용해 도시 거주인구의 거주허가를 제한하여 사람들이 도시에 과도하게 몰리지 않도록 방지했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거주지 제한이 풀리자 사람들이 일자리나 학업으로 주요 도시로 몰리면서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한국의 [[서울 공화국]]과 유사하게 수도 집중이 심한 편이다.] 이사가기는 쉽지 않아서 식구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아파트를 재할당받을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 때문에 소련인들은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사는 아파트를 가리켜 토끼집이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부동산이 민영화되고 임대료와 부동산이 급속히 오르면서 집값과 임대료 감당이 힘든 서민들은 이런 이유로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 특성상 [[르 코르뷔지에]] 등 현대건축의 영향을 받아 [[도시계획]]을 구상할 때 녹지 면적을 많이 조성한 편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구소련권 국가들이 1인당 국민소득이 낮음에도 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해 눈에 보이는 슬럼가가 별로 없어서 경제적 형편이나 도심 외관이 나아보인다는 평을 듣기는 한다. 하지만 아파트들의 모양새가 비슷비슷하여서 칙칙하다는 평도 듣기도 한다. 다만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국내여권|거주지 등록]]같은 거주이전 제약이 사라지자, 시베리아나 오지 지역에 정책적으로 조성된 도시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은 경제적, 사회적 여건을 이유로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유령도시가 대거 발생하였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소련/문화, version=31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