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군 (문단 편집) === 낮은 [[훈련]] 수준 === 미군보다 부족한 경제력으로 3배 이상 거대한 군대를 유지하던 소련군의 특성상 [[기초군사훈련]] 역시 당대의 NATO군 대비 크게 떨어졌는데, [[베트남전]]기의 미군 역시 징병제임에도 9주간의 훈련을 시켰고, [[프랑스군]]과 [[독일 연방군|서독군]]의 경우는 무려 3개월간에 가까운 기초군사훈련을 시켰지만, 소련군은 겨우 '''6주'''간의 훈련기간을 가졌으며, 그마저도 실질적인 훈련은 약 4주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6주였지만, 실질적으로 받는 훈련을 받는 기간이 4주 정도밖에 되지 않다보니, 냉전기 [[미합중국 중앙정보국|CIA]]에서는 소련군의 훈련기간을 약 4주로 예측했었다.] 단순히 훈련기간만 짧은 것도 아니고, 훈련 시수 역시 짧았는데, 1960년대의 베트남전기의 징병제 미군역시 주당 44시간에 총 352시간의 훈련 시간을 가진 반면, 소련군은 1990년에도 주당 48시간에 192시간의 훈련 시간을 가졌으며, 이마저도 정훈 교육을 굉장히 중시하던 소련군 특성상 이것을 제외할 시 144~168시간까지 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60년대 미군의 훈련 수준의 절반도 안되던 양이었다. 현대 [[한국군]]처럼 훈련 시간이 짧아도 개개인의 교육 수준이 높다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했지만 소련의 평균 의무교육기간은 보통 10년[* 유치원기간까지 합치면 이보다 길어지기는 한다.]이라 서방권보다 2년이 짧았고, 소련의 [[대학생]]들은 장교 자원으로써 합법적으로 면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마저도 기대하기 힘들었다. 열악한 군수능력과 조직체계상의 약점은 소련군의 훈련수준 역시 저하시켰다. [[조선인민군|북한군]]처럼 개막장은 아니었지만 훈련량은 확실히 부족했는데, NATO군 전차승무원이 일반적으로 연간 100~200발의 전차포 교탄을 소모할 때 소련군은 정예사단이 연간 50발, 보통은 20여발 수준의 전차포 사격을 수행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엔진 신뢰성 및 부품 수급 문제 때문에 전차 기동훈련은 끽해야 중대급이었으며, 전차병의 훈련 수준도 NATO군에 요구되는 것보다 크게 낮았다.[* 여기에는 미군과 소련군의 방침 차이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미군은 '운용하기 쉽고, 수리하기 쉬운' 엔진을 만든 반면, 소련군은 '만들기 쉽고 잔고장은 적은' 엔진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웬만한 고장은 내구도로 버티다가 치명적 손상에는 엔진을 갈아버리는 것으로 대처한 것. 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생산과 효율 측면에서는 뛰어났을지 몰라도 실제 훈련과 야전상황에서는 좋지 못했다.] 미군 [[M1 에이브람스]] 전차병들이 2,000m 거리에서 등장한 표적을 12초 이내에 90% 확률로 격파할 것을 요구받은 데 반해 소련군은 최대유효사거리 내의 표적을 60초 이내에 격파하는 것이 기준이었다. 차탄 사격 시간도 미군은 5초, 소련군은 12초. 독일군이나 [[네덜란드군]]의 [[레오파르트 2]]도 미군 M1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능상 서방 신예 3세대 전차와의 비교는 불공정하다고? CAT '85의 성적을 보면 [[M60 전차]]이나 [[레오파르트 1]], [[치프틴 전차]] 같은 구형 전차들의 퍼포먼스가 3세대 전차들보다 좀 떨어지긴 했지만 표적과 교전하는 데 16.2초 이상 걸린 전차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이 기준은 [[군필자]]라면 알겠지만, 한 두번 정도 훈련받은 신병도 충족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너무나 낮기 때문에 부대에서 자체적으로 훈련도를 조정했을 가능성은 높다.] 소련군은 충분한 교탄과 부품을 일선에 보급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 부대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부사관을 단기 징집으로 유지하는 조직체계상의 문제 때문에 충분한 훈련도를 확보할 수 없었다. 전차소대 내에 2년 이상 야전에서 근무하면서 훈련한 병력이 1/4을 넘기는 [[소대]]는 극히 드물었으며, 사실 2년 이상 복무한 인원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징집병을 유지하면서도 전문적 부사관을 육성해 부대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서유럽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그 대가는 [[BGM-71 TOW]] 탑재 지프를 동축기관총 5~7발로 격파할 수 있다는 비실전적, 아니 '''비현실적'''인 훈련기준이었다.[* Zaloga, Steven J. ''Tank War-Central Front: NATO vs. Warsaw Pact'', Osprey Publishing, 1989][* 해당 서적의 한국어 번역은 [[http://bluefalcon.egloos.com/4333134|여기로]]] 심지어 이런 문제는 특수부대인 스페츠나츠도 피해갈 수 없었다. [[스페츠나츠]] 또한 전원이 2년 복무하는 징집병 중에서 임의로 인원을 선출하였고, 이들 부대의 부사관 역시 한국군의 병장 계급 비슷하게 징집병 중에서 복무기간이 긴 병사에게 그냥 주어진 것. 그나마 스페츠나츠의 명성에 관심을 보이고 지원하는 병사도 많았다고 하며, 이들을 정규직 부사관 학교에 보내어 못 버티는 사람은 탈락시키고 나머지를 훈련시키는 식으로 인적자원의 질을 좀 더 높여보려는 시도는 하였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의 질적 수준은 소련군 상층부의 인식에서도 조금 더 특수한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 병사 정도였다. CIA 자료를 보면 실질적으로 특수전에 관해 훈련받은 기간은 부대에 따라 다르지만 공수훈련을 포함하여 대체적으로 약 2달에서 3달정도로 예측되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특수전을 하기에는 훈련기간이 너무 짧기때문에 잘봐야 수색대나 레인저 정도의 훈련 강도라 봐야한다.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아프가니스탄]]의 실전에서 일반 보병부대보다 이들의 전과가 높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이들이 체계적인 훈련을 잘 받은 것보다는 임무의 특성상 소련군에서 이례적으로 자율판단과 행동을 허가받았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소련군 내에서 몇 안되는 '병사 개개인의 창의성, 독창성'을 인정받은 병종이라 게릴라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실제로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스페츠나츠들과 교환훈련을 하게된 미군 특수부대원들이 이들의 사격, 전술 능력에 대하여 "명성만큼 대단하지는 않다"라고 평가를 하였으며, 그 분야에서 도리어 여타 동유럽 특수부대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 영국의 특수부대원 출신들에게 동유럽 최고의 특수부대를 뽑아보라고 하면 러시아의 [[알파 그룹]] 등은 언급도 안 되고, [[폴란드]]의 [[폴란드군#s-6|그롬]]은 거의 반드시 언급된다.] 실제 사례에서도 인질 구출 작전에서 인질의 안전보다는 인질을 잡은 테러범을 때려잡는데 더 집중한다거나, 버스 인질극 제압 시범을 보일 때 수류탄과 폭약으로 버스를 아주 박살내버리는 동영상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작 전문적인 특수부대가 나온 건 소련이 붕괴한 뒤 러시아가 되고 나서 체첸 저항세력과 마피아를 상대로 한 저강도 전쟁이 일상화되면서부터다. 일례로 1997년 [[스베르들롭스크]] 주에서 열린 스페츠나츠 대회(Spetsnaz Competition)에서 미군 특수부대 최초로 참가한 [[델타 포스]] 출신 전술사격 교관 마이크 페넌 같은 경우 스페츠나츠를 "실력에 비해 많이 과장됐다"고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