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벌도리 (문단 편집) == 상세 == [[사로국]]이 공식적으로 건국되기 전 [[경주시]] 지역의 6촌 중 돌산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다. 훗날 신라 6부 중 사량부의 시조가 됐다. 이름의 '소벌'은 신라의 옛 이름인 [[서라벌]]과 같이 '''쇠벌'''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6촌 촌장이 될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서는 6촌의 구성원이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쓰고 있다. 학계에서는 앞서 멸망한 [[고조선]] 유민 세력들이 [[한반도]] 남부로 남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준왕]]을 따르는 세력이 한반도 서남쪽으로 내려갔듯 동남쪽에도 유민 유입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로 6촌의 촌장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져온다. [[박혁거세]] 탄생 설화에서는 소벌도리가 [[나정]]에서 혁거세의 [[알]]을 처음 발견하고, 10살까지 집에서 키우며 나중에 왕으로 추대할 때도 주도적 역할을 한다. 설화적 윤색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혁거세 집단이 즉위하고 신라의 원형이 만들어지는 데서도 6촌 중 가장 큰 공을 세운 후원세력의 우두머리로 볼 수 있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한개 있어 깨뜨려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잘 길렀는데,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 >---- >《삼국사기》 그의 아들 최대벌리(崔大伐利) 혈통으로 25세손 [[최치원]]이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고, 다른 아들 소해리(蘇解理)의 24대손 [[소경]]([[알천]])이 진주 소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다만 알천은 [[태종 무열왕]]의 형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서 다소 불확실하다.[* '소벌'을 '쇠벌'로 추정한다면, 소(蘇)·최(崔)는 김(金)과 '쇠'라는 의미를 공유한다는 뜻이니 이들이 근연관계일 수는 있다.][* 경주 최씨 대종회에서는 소벌도리를 소씨의 조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분류:아시아의 섭정]][[분류:신라의 개국공신]][[분류:신라의 추존 왕]][[분류:최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