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서노 (문단 편집) === 출신과 초기 일생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조에 따르면 추모(동명성왕)가 처음 [[부여]]에서 도망쳐 나와 [[졸본]]에 이르러 졸본왕의 왕녀 3명 중 차녀와 결혼했다가 졸본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고, 그 사이에 온조와 [[비류]]를 낳았다. 여기서는 소서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온조왕-조에 실린 다른 기록에 따르면 소서노는 졸본 사람인 [[연타발]](延陀勃)[* '연타취발'이라고도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근거는 없다.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문헌에서는 '연타취발'로 등장하는 경우가 전혀 없고, '연타취발'이 쓰인 책이 하나가 있는데 바로 위서 《[[환단고기]]》이다. 설명이 필요없다.]의 딸로 [[추모성왕]]과 혼인하기 이전에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혼인했다고 한다. 우태와의 사이에서 소서노는 두 아들인 온조와 비류를 얻었으나 남편 우태가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소서노는 졸본으로 돌아와 살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온조와 비류는 원래 동명성왕의 친아들이 아닌 의붓아들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 경우에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백제 건국의 주체 자체가 다른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추모가 홀본에 이르러 건너편 홀본군의 여자를 아내로 삼아 두 아들을 얻었다고도 하였는데 무엇이 사실인지는 알기 힘들다. 그리고 《삼국사기》 3번째 건국설[* 《[[수서]]》와 《[[북사]]》를 인용한 것으로 기록된다.]에 따르면 대방의 옛 땅에서 [[구태]]가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의 [[딸]]과 결혼하여 백제를 건국했다고 전한다. 본래 백제는 [[동명성왕]]을 [[시조]]신으로 모셔 [[제사]]지냈으나 후기로 넘어가면서 시조신을 '구태'(仇台)로 바꾸었는데 일각에선 이 구태를 [[우태]]와 동일 인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문제는 제3의 건국자가 다른 사서에서는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제26대 [[성왕(백제)|성왕]] 시대 [[남부여]]를 자칭하면서 부여와의 연결고리를 강조한 결과물로 추정되거나 혹은 중시조인 [[고이왕]](제8대)을 강조한 것으로 보는데 이러면 소서노와 결혼한 우태의 정체가 분명해지지만 소서노의 의의가 이상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중국]] 쪽 사서의 인용이라는 점에서도 잘못 전래되었을 가능성 등이 있어 이쪽 건국설에 대한 연구는 빈약한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