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수림왕 (문단 편집) == 태자 시절 및 즉위 == 《[[삼국사기]]》에는 그에 대해 신체가 장대하고, 웅대한 지략을 가진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며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18r_0030_0010&position=-1|#]] 355년 1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이후 활발하게 정사에 개입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340년에 태왕의 명령으로 [[전연]]의 태조 문명제 [[모용황]]을 [[예방#s-2]](禮訪)한 것으로 보이나 소수림왕이 355년에 태자가 된 것을 감안하면 소수림왕과는 다른 인물이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움직임 덕에 군주로서의 정무를 좀 더 일찍 수행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그리고 [[전연]]의 침략 이후 고구려의 태자가 [[사신(외교)|사신]]으로 갔다 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소수림왕이었는지는 불분명한데 [[고국원왕]]의 [[장남]]이 소수림왕인 것을 보면 그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에 장남이 사신으로 다녀온 경우도 제법 많았고,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사신(외교)|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전연]] 및 [[전진]]으로 들어오는 각종 [[유교|유]] • [[불교]] 서적을 접하고 그것을 토대로 [[고구려]]의 정치 체제를 [[업그레이드]] 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즉, [[율령]][* 형법과 행정법] 반포와 [[불교]] 공인, [[태학]] 설립도 이 시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고국원왕]] 10년에 세자를 사신단으로 보냈다는 기록은 340년인데 그 당시에는 소수림왕이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이거나 [[갓난아기]]였다. [[관례#s-2]]상 [[성년]]이 되는 나이는 15세이고 그때 즈음에 태자로 책봉되기 때문에 추정컨데 이 사신으로 보내진 세자는 일찍 요절하고 후대에 소수림왕은 세자 혹은 태자로 즉위 했을 것이다. 애초에 [[고국원왕]] 10년에 나온 세자가 15년 후에 나오는 태자 ‘구부’와는 다른 인물일 수 밖에 없고 구부를 소수림왕이라고 [[비정#s-2]]한다면 고국원왕 10년 기록의 세자는 소수림왕의 [[이복형제|이복형]]이거나 [[동복형제|동복형]]일 가능성이 크다. [[371년]] [[10월 23일]],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투(371년)|평양성 전투]]에서 백제군이 날린 [[화살]]에 맞고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고국원왕이 부상을 입자 대신 전투를 지휘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고국원왕이 쓰러졌는데도 [[평양성]]이 함락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소수림왕이 있든 없든 간에 결사 항전이 심하여 [[근초고왕]]이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