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수림왕 (문단 편집) === 백제에 대한 반격 === >五年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5년 가을 7월에 백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앞서 서술된 일련의 정책들을 통해 고구려의 국력이 회복되자 소수림왕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지 마침내 재위 5년만인 375년 7월, [[백제]]와 싸워볼 만하다고 판단하고는 군대를 보내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한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반격하려고 했으나 [[흉년]]이 들어 하지 못했다고 하니 소수림왕으로써는 조금이나마 아버지 고국원왕의 원한을 풀 만한 [[복수]]였을 것이다.[* 다만 권근은 "부모의 원수 갚을 생각은 안하고 율령을 반포하고 불사(佛寺)를 창건만 하다가 이제 와서 겨우 수곡성 하나 함락시킨 그것도 복수라고 할 수 있나?"라고 《동국사략》에서 비난했다. 권근이 근본적으로 [[불교]]를 괴력난신으로 보는 유학자임을 감안하긴 해야겠지만.] 1년 후인 376년 [[근구수왕]]이 즉위하자마자 고구려는 백제의 북쪽 변경을 다시 공격했으나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6년 겨울 11월에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이러한 침략이 거듭 이뤄지자, [[근구수왕]]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는지 [[고구려]]에 대대적인 역공을 가했다. 3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두 번째로 [[평양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간 것이다.[* 백제 역사상 평양성을 직접 본 것이 확실한 왕은 [[근초고왕]]과 [[근구수왕]]뿐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백제)|성왕]]이 남평양을 점령했다는 글귀가 있어서 성왕 역시 평양을 직접 본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남평양'은 고구려에서 지금의 서울 일대를 가리키던 표현이었다. 다만 《[[일본서기]]》에서는 한성과 평양을 구분지어 서술하고, 백제, 왜의 연합군이 평양을 치자 고구려왕이 궁의 담을 넘어 도망쳤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七年 十一月 南伐百濟。 >7년 11월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침공해 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3년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침범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하지만 소수림왕은 이를 막아냈고, 그해 11월에 백제에 대한 역공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또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백제와 아웅다웅하며 서로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는 사이, [[거란|거란족]]이 소규모 침공을 해온 기록이 남아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당시 고구려가 또다시 군사를 일으키긴 힘들어 보인다. 이후 별다른 침공 기록이 없다가 재위 14년째인 384년 11월에 승하하고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