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작(농업) (문단 편집) ===== 개항이후 ===== 조선 고유의 소작제도는 개항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큰 변혁을 맞이하는데, 식량인 쌀을 해외시장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혁점이었다. 개항기 이후 쌀의 수출을 통하여서 부를 축적한 신흥 지주계층이 생성되었고, 이들은 병작반수제 하에 현물로 받은 소작미를 주로 일본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安齊霞堂이 펴낸 『충청남도발달사』, 1930, pp.296~300에 보면, 개항이전에 대지주가 된자가 3명(4%)에 불과하지만, 개항기에 대지주가 된자가 42명(62%), 1910년대, 1920년대에 각각 17명(25%), 6명(9%)으로 일제시대에 이르기 까지 개항기에 지주가 된 사람이 제일 많았다. 특히 구한말 개항 초에는 주 수출곡물인 벼의 도정상태가 좋지 않아 일본 벼의 하급대체제로 유통되었으나, 일제시대가 되어서는 산미증식계획과 수리조합개설 등으로 생산량이 증가했고, 일제로부터 개량 벼종과 기계화 도정을 도입한 결과, 쌀의 도정상태와 품질이 급격히 좋아지면서 오히려 일본 본토의 쌀보다 품질이 월등하고 가격은 저렴한 위협적인 판매상품이 되었다. 자연히 쌀을 팔던 조선지주들의 경제적 영향력도 올라갔다. 그에 반해 소작농은 불리한 처지에 놓였는데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면서 기존의 중층적 소유권을 정리하고 토지의 소유권은 확립하였지만, 소작권은 부정하면서 지주가 언제든지 소작농을 자기 땅에서 내쫓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설명했고, 또 후술하겠지만 프랑스의 근대민법에서는 소작인의 권리인 소작권을 분명히 보장하였으나, 프랑스 민법을 도입한 일본은 이 항목을 삭제한 채로 도입한다.] 한편 일제시기를 거쳐 소작농의 형태도 변화하게 되는데, 종래에는 자작과 소작을 겸하는 자소작농이 많았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8년 이후 동유럽산 곡물의 막대한 유입으로 쌀값이 하락[* 제1차세계대전 기간중 세계시장에 동유럽산 곡물의 공급이 중단되어서 일본을 비롯한 국가들의 곡물가격이 올라갔으나, 이후 공급이 재개되면서 곡물값이 큰폭으로 하락하였다.], 1930년 세계대공황에 영향을 받은 쇼와대공황등을 맞으면서 자작농민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수확이 잘되고 화학비료에 강한 일본의 신품 벼종자나 화학비료등을 공급받기 위해 자작을 포기하고 순수소작농이 되는 경우가 더욱 두드러졌다. 1920~30년대에는 수확량의 절반을 납부하는 종래의 병작반수제에 대해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소작쟁의가 광범위하게 벌어졌고 소작농민의 처우개선을 위한 다양한 부대변혁이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소작료 인하만큼은 지주들의 권세가 워낙 강성한 탓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50%의 소작료율은 일제 패망 직전까지 유지되었다.[* 지주들의 위세가 높아 조선총독부의 정치자문기구인 중추원조차 지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일본 제국의회에서 총독부가 지주들의 수입원인 쌀의 이출을 두고 농림성과 갈등을 빚을 정도였다.]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지만 많은 수의 지주들은 일제보다 더 악랄하게 착취하여 많은 농민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고액의 지대에 반발하여 소작쟁의를 하는 등 권리를 보장받고자 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하지만 지주들의 위세는 1930년대 들어 퇴조하기 시작했다. 총독부는 소작쟁의가 반일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어느 정도 소작농들의 의사를 반영해주는 방향으로 정책을 개선한다.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 1934년에 조선농지령을 제정해 소작농의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여 지주들의 횡포를 견제하고자 했다. 지주들은 이 법령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당시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이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관철했다. 물론 이것이 식민지 지주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은 것은 아니었지만 소작농의 항의 및 이탈로 인한 농촌 사회의 붕괴를 막는 데 기여했다.[* 정연태, 1930년대 '조선농지령'과 일제의 농촌통제, 역사와현실] 아울러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벌여 전시동원체제를 확립하자 지주고 소작농이고 공출로 식량 뜯어가는 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소작농들이 더 힘들긴 했겠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