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작(농업) (문단 편집) ===== 장원의 해체와 소작의 성립 ===== 이러한 장원제는 15~16세기 기나이(畿內) 평원[* 교토 근방의 야마시로, 야마토, 카와치, 이즈미, 셋츠 지방의 총칭하는 명칭이다.]을 중심으로 큰 변화를 맞이한다. 세금인 연공을 수확물인 현물 대신 화폐(금전)로도 납부할 수 있게 하였는데, 이를 위해 농민이 스스로 농작물을 시장에다 내다 팔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전까지 시장은 귀족과 소수 상공업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시장을 이용해본 농민들이 더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수확량을 더 늘리려 들었다.[* 물론 초기에는 기나이 지방에만 변화를 보이고, 다른 지역은 여전히 장원제가 보편적이었다.] 때마침 농지에 물을 대주는 수도작법이나 보리와 벼를 번갈아 심는 이모작법, 그리고 비료를 사용하여 지력을 높이는 시비법등이 도입되자, 적은 면적으로도 일가족이 생활할만큼의 수확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넓은 토지를 광작경영하는 것보다 보다 제초나 비료투입 등 보다 적은면적에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하는게 생산성에 더 효과적이었고, 이미 시장을 통해 자기 땅을 경작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직결됨을 알게 되면서 점차 장원이나 대가족에 의존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이에 장원은 점진적으로 쇠퇴하였고, 종래 20~30명에 달하였던 대가족들은 4~5명의 소가족으로 분할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독자적인 경작지가 없던 나고와 게닌도 소작지를 얻기 시작하여 예속농민에서 소작농민으로서 지위가 상승하였다. 영주가 장원을 직접 관리하는 방식이 쇠퇴하고, 농민에게 경작을 위임하고 소작료를 거두는 것이 보편화되자, 기나이 평원에 거점을 둔 [[오다 노부나가]]는 장원경영을 포기하고, 거두어들인 소작료를 바탕으로 상비군을 창설 및 육성하여 병사와 농민을 분리시켰다. 그래서 노부나가의 상비군은 농번기에 구애받지 않았고, 마침내 그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일본전국이 통일되며, 이후 다시 에도막부가 들어서면서, 전국의 장원은 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해체된다. 또한, 소작제도가 파급되던 초기 기나이 지방에서는 조세의 급납화가 이루어졌었으나, 다시 에도시대에 이르러서는 석고제가 실시되면서 쌀의 무게를 가늠하는 도량형인 석과 고를 바탕으로 재정의 규모를 계산하도록 하여, 조세의 수취를 현물인 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