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정방 (문단 편집) === 돌궐 전선 === [[당나라]]에서 벼슬해 광도부 절충으로 [[이정(당)#s-1|이정]]을 따라 39세이던 630년, [[동돌궐]] 정벌에 참여했고 귀환하자 좌무후중랑장이 되었다. 이때가 39세였지만, 이상하게도 이후 세월이 흘러 [[환갑]]도 넘은 655년까지 진급이 없이 뚜렷한 기록이 없다. 아무래도 두건덕 세력 출신의 소위 항장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가 당 제국을 대표하는 장수로 부각된 것은 655년 [[고구려]] 원정과 656년 [[서돌궐]] 원정에서였다. 655년 2월 영주도독 정명진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어 655년 5월에는 정명진 등이 고구려군 병력이 적은 지점을 발견하고 공격해 1,000여 명을 죽이고 외곽과 촌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앞의 2월 기록을 봐선 5월의 전투에도 정명진 등(等)의 진영에 소정방이 포함되어,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655년 [[서돌궐]] 내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이 기회를 틈타 [[정지절]]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공격한 당나라 원정군에서 전군총관으로 종군한 소정방은 서돌궐군 20,000여명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고, 이때부터 당나라 군부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돌궐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소정방은 한 장수의 시기를 받았다. 당시 응사천(鷹娑川)에서 당나라와 서돌궐은 서로 호각으로 겨뤘는데, 돌궐의 서니시(鼠尼施)가 군대를 이끌고 추가로 당도하자, 소정방은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서니시가 당도하는 모습을 보고 즉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서니시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그런데 부대총관인 [[왕문도]](王文度)라는 장수가 소정방의 공적을 시기하여, 총지휘관인 정지절에게 >“비록 이번에 적군을 물리쳤다고는 해도, 관군도 마찬가지로 사상자가 생겼는데,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법도가 어찌 이 일이라 할 수 있습니까? 지금부터는 마땅히 방진을 치고 치중대는 모두 안쪽에 배치하며, 사면으로 군대를 펼치고 갑옷을 입은 채 수비하고 있어야 만전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갑옷을 벗어서 가벼워지는 것은 없으니, 병사의 손실이 덜해질 것입니다.” 라고 건의했다. 왕문도는 또한 정지절이 용맹함을 믿고 적을 가볍게 여긴다며 고종의 칙명을 사칭하여 자신이 군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나라 군대는 피로가 극에 달하여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 소정방은 여기서 정지절에게 왕문도를 유폐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정지절은 소정방의 건의를 따르지 않았다. 뒤에 항독성(恒篤城)에 당도하여 몇몇 오랑캐들이 항복하자, 왕문도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취하자고 건의했다. 여기서 소정방은 약탈한 재물을 단 하나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정지절은 이때의 일이 원인이 되어 면직되었고, 소정방을 시기했던 왕문도는 처형되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뒤에 제명되어 서인이 되었다. 657년, [[고종(당)|당 고종]]은 서돌궐을 정벌할 것을 결정하고 소정방을 필두로 [[임아상]], 소사업 등 당나라측 장수와 아사나마사, 아사나보진 등 기마부족에 속한 이민족 번장들을 지휘부로 삼아 서돌궐 공략을 시작했다. 가장 선두에 있었던 것은 소정방군이었는데, 보병 10,000여명과 회흘(위구르) [[기병|기병대]]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서돌궐]]측은 이런 소정방군을 제거하기 위해 기병 100,000여 명을 동원했는데, 이런 압도적인 전력 차이와 양군의 전투 기록에서 여타 당군의 지원과 관련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유목]] [[기병]]의 기동력을 살려 흩어져 진군하는 당군을 각개격파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정방군은 금산이라 불리는 지역에서 서돌궐측 부대 하나를 격파한 이후 전진했으나 예질하에서 서돌궐군 본대와 조우하여 위기에 처했다. 서돌궐측이 노린 대로 소정방군과 서돌궐군의 전력차는 현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예질하 전투'''에서 소정방은 강 근방의 고지대를 선점한 이후 보병 10,000여 명으로 서돌궐군 10만 기의 세 차례에 걸친 맹공을 모두 튕겨내는 괴력을 발휘했고, 이에 전열이 흐트러진 서돌궐군에 대항해 자신이 스스로 위구르족 기병을 지휘, 역습을 가해 서돌궐측을 대파해 버리고 말았다. 거기다 이후 퇴각하는 서돌궐측을 거듭 추격했고, 당군의 맹공에 투항하는 부족이 늘어나면서 서돌궐 세력은 빠른 속도로 소멸되어 갔다. 소정방은 투항하는 부족들은 아사나마사 등 후방의 당군에 맡겨버리고 자신은 계속 서돌궐측 수뇌부를 추적했는데, 폭설이 내리자 당군이 오지 못하리라 안심하고 있었던 서돌궐측에 대해 200리를 돌파해 기습을 가하는 것으로 응수했고, 결국 여기서도 깨진 서돌궐 가한을 포함한 지도부는 중앙아시아 서역으로 도망갔다가 그 지역 국가들에 의해 당나라에 인도되어 나라가 멸망해 버렸다. 이 전공 한방으로 소정방은 [[설인귀]] 이상의 위상을 지닌 장군으로 솟아 올랐다. 659년에는 사결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했고, 오해에서 [[토번]](티베트) 군대를 토벌했다. 소정방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형국공'''(刑國公)으로 책봉되었으며, 또한 소정방의 아들인 소경절(蘇慶節)도 무읍현공(武邑縣公)에 책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