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소찰 (문단 편집) == 생애 == 소명태자 [[소통(양나라)|소통]]과 원황태후(元皇太后) 공씨(龔氏)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할아버지 [[양무제|무제]]로부터 곡아공(曲阿公)으로 봉해졌다. 531년, 아버지인 소통이 죽은 뒤 악양군왕(岳陽郡王)으로 봉해졌고, 이어서 동양주자사(東揚州刺史)에 임명됐으며, 회계(會稽)를 진수하였다. 546년, 옹주자사(雍州刺史)로 개임되었고 양양(襄陽)을 진수하였다. 549년,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숙부인 상동왕 [[소역]]이 군량 문제로 자신의 요구를 거부한 소찰의 둘째형 하동왕 [[소예]]를 공격했다. 소찰은 형 소예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패배하였고, 결국 소예는 살해되었다. 이로써 소찰은 소역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양양을 가지고 [[서위]]에 투항했다. 550년,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가 소찰을 양왕으로 봉하고 554년, 서위군이 소찰과 함께 [[형주|강릉]]을 공격해 함락시키자 소찰은 당시 양나라 황제였던 원제 소역을 흙주머니로 눌러 압사시켰다. 555년, 소찰은 양나라 황제로 즉위했고 강릉을 [[수도(행정구역)|수도]]로 정했다. 하지만 서위는 강릉 부근 8백 리의 땅과 양양 등지를 모두 차지하였고, 아울러 강릉 일대 백성들의 재산을 모두 노략질하여 아무것도 없게 하였다. 562년 1월, [[북주]]의 무제 [[우문옹]]이 사소한 문제로 사신을 보내 책망하자 우울하고 걱정했다. 결국 [[종기]]가 등에 나 앓던 끝에 병사했으며, 평릉(平陵)에 안장되고 [[차남]] [[양명제|소규]]가 뒤를 이었다. 소찰은 검약하고 소박한 것을 편안해 했고, 술과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시샘하고 꺼리는 것이 많았지만 장수와 군사들을 어루만지며 은혜를 베풀었다. 하지만 영토의 강역이 한쪽으로 치우쳤고 좁아서 읍과 거주지들이 쇠퇴해 무너졌으며,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끝내 뜻을 얻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