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크라테스 (문단 편집) == 영향과 평가 == > ἥδε ἡ τελευτή, ὦ Ἐχέκρατες, τοῦ ἑταίρου ἡμῖν ἐγένετο, ἀνδρός, ὡς ἡμεῖς φαῖμεν ἄν, τῶν τότε ὧν ἐπειράθημεν '''ἀρίστου καὶ ἄλλως φρονιμωτάτου καὶ δικαιοτάτου.'''[* 로마자 전사: hēde hē teleutē ō Echekrates tou hetairou hēmīn egeneto andros hōs hēmeis phaimen an tōn tote hōn epeirathēmen '''aristou kai allōs phronimōtatou kai dikaiotatou'''] >---- >이것이 우리 벗의 최후였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우리는 말할 겁니다. 그는 당시 우리가 겪었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현명하며 가장 정의로웠노라고.''' >---- >플라톤의 《파이돈》 마지막 장면(118a)[* 원문은 [[http://www.perseus.tufts.edu/hopper/text?doc=Perseus%3Atext%3A1999.01.0169%3Atext%3DPhaedo%3Asection%3D118a|Perseus Digital Library]]에서, 한국어 번역은 정암학당 전헌상 번역에서 발췌. 비록 파이돈의 입을 빌리기는 했지만 소크라테스에게 바치는 플라톤의 헌사이다.]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점은, 다양하다 못해서 심지어 서로 충돌하는 듯한 사상들이 제자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국론>에서 언급하듯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이러한 다양성이 나올 수 있었던것은 그만큼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가진 사상과 삶의 폭이 넓고 깊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김주일, 2023] [* 공교롭게도 이는, [[공자]]의 사망 후 제자들에 따라 학파가 난립한 것과 비슷하다. "공자가 죽은 이래, [[전손사|자장]]의 유가, [[자사#s-1]]의 유가, [[안회|안씨]]의 유가, [[맹자|맹씨]]의 유가, 칠조씨의 유가, 중량씨의 유가, 손씨([[순자]]를 지칭한 것으로 추정)의 유가, 악정씨의 유가가 있었고, ..."(自孔子之死也, 有子張之儒, 有子思之儒, 有顔氏之儒, 有孟氏之儒, 有漆雕氏之儒, 有仲良氏之儒, 有孫氏之儒, 有樂正氏之儒)(《[[한비자#s-2]]》, 〈현학(顯學)〉)] * [[플라톤]] : [[형이상학]]의 시작이자 끝. [[아카데미]]를 창시했다. 소크라테스의 명료한 사고 방법론과 초월을 추구하는 태도에 영향받았다. * 소(小)소크라테학파 : 플라톤 보다 영향력은 작았던 3개 학파를 지칭하는 용어다. * [[안티스테네스]] : 개인의 본성을 사회와 대비해서 중시하고, 금욕과 자기극복을 추구했다. [[키니코스 학파]]를 창시한다. 그의 제자 [[디오게네스]]의 삶이 그의 사상을 잘 나타낸다. 소크라테스의 정의로움, 소박하고 절제된 삶에 영향받았다. * [[키레네 학파|아리스티포스]] : 현재의 지적 쾌락을 미래의 것과 대비해서 중시했다. [[키레네 학파]]를 창시했다. 호기심과 지적탐구의 즐거움에 몰입해서 살았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 [[메가라학파|에우클레이데스]] : 논리정신을 추구했다. [[메가라 학파]]를 창시했다. 유명인들과 무수하게 벌였던 소크라테스의 논쟁들에 영향 받았다. * [[파이돈]] : 엘리스 학파를 창시했다. 소크라테스의 육체적 삶보다 이성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는 태도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크세노폰]] : 의무와 절제를 중시하면서도 실용적인 정치철학을 추구했다. 남성적이면서 시민으로써 의무와 자유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소크라테스 학파의 난립에 관해 요한네스 힐쉬베르거는 《서양철학사》에서 그 이유를 "소크라테스는 일정한 학파의 교의(도그마)를 남겨주려고 했다기보다, 오히려 철학하는 것 자체를 자극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자기의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서로 다르게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다. 그의 사상은 그만큼 비밀스러웠던 말인가? 또는 그렇게도 풍부했다는 말인가? 또는 그만큼 미완성품이었단 말인가? 이런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사상의 방향들 중에서 어느 것이 스승의 원래적인 본질과 의도에 꼭 들어맞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관한 결정은 우리들이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즉 플라톤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려질 수 있다. >---- >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그는 생전에 책을 쓴 적도 없고,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한 적도 없다. 중앙대 심리학과 이장주 교수에 따르면, 그는 책이 기억력과 사고력을 감퇴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에 책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비슷한 일례로는 《[[인간의 조건]]》 시즌1의 '''휴대폰이 없다면''' 에피소드에서 개그맨 [[김준현]]이 한 말인,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즉, 기록에 의존해서 기억력과 사고력이 감퇴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고대 세계에서는 의외로 그리 드물지 않았다.[* 실제로 고대의 서적은 부피도 크고 휴대도 불편했으며, 활자의 제작 역시 학자의 영역보다는 장인(기술자)의 영역이었다. 또한 내용은 적게 담으면서 제작 기간 역시 오래걸리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서적보다 토론에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로는 [[도가|노장(老莊)사상]]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 참고로,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를 플라톤에 의해 날조된 인물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뿐만이 아닌, 다른 제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소피스트들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문헌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특히 제자인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행은 플라톤의 것과 상당히 차이가 있다. 플라톤의 후기 작품에 나오는 소크라테스는 이름만 소크라테스일 뿐, 플라톤의 고유한 사상을 소크라테스라는 등장인물이 말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철학적 업적 자체는 적다고 생각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이는 상당히 잘못된 생각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귀납논증|귀납적 방법론]]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좀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귀납의 창시자를 소크라테스에게도 돌린 적이 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귀납과 산파술을 통해 보편적 개념을 만들려고 했던 것은 어느 정도 인정되는 바이다.] 통해 비로소 대상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으로 직접적으로 계승되어, 더 나아가서는 2,600년 서양 철학사를 꿰뚫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형상철학으로 이어지기 때문. 때문에 철학적 업적 또한 결코 적지 않다. 당장 플라톤을 비롯해 그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아카데미를 연다든가 하면서 각자의 철학 학파를 창설했을 정도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인기는 죽은 이후에 오히려 올라갔으며,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은 상당히 유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비록 플라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철학적 업적과 영향력은 상당한 편. 그리고 더 나아가 인지도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최고[* 당장 한국만 해도, 플라톤을 모르는 이는 널리고 널렸지만, 소크라테스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를 달린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삶의 모습과 진리를 대하는 참된 자세, 그리고 죽음의 상징성[* 자신이 믿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 비견될 만큼 상당히 충격적이다.]이 매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묘사되듯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나 친구들은 재산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끊임없이 탈옥을 권한다. 고대는 물론 중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반역죄나 살인죄 같은 엄청나게 사악한 죄상이 아니고서는 죄수를 처박아놔서 콩밥 먹이거나 사형을 시행시켜봤자 딱히 좋거나 얻을 게 없기 때문에, 걍 범죄종자가 꺼져버리고 다신 자기네들 공동체에 얼씬도 않으면 그러려니 했었다. 실제로 진상이 다르게 밝혀지거나 범죄자가 다시 필요해져서 불러들이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플라톤의 대화》에서 묘사되는 간수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고, 그를 사형시키기 싫어하면서 은근히 탈옥에 대해서도 그리 부정적인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평생 내가 아테네의 법률을 따랐고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혜택을 입었으며, 또 평생 아테네를 위해 옳은 말을 해왔는데, 탈옥한다면 내 가르침들이 빛이 바래고 말 것이니 사형 선고에 묵묵히 복종하고 후회하지 않겠다며 의연하게 '''독배를 마셔 죽음을 택했다.''' 아마 이로 인해 아테네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지 않았나 하고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소크라테스의 위상이 그의 사후에 급격하게 올라가면서 특히 죽음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모습이 크게 조명되었다. 어느 공동체가 안 그러겠냐만 당시 아테네인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절제 등을 주요한 가치로 여겼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빗대어서 직접 민주주의의 실패 또는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한다. 잘 선동된 군중들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거나 정적을 매도하는 것이 매우 쉬운 일이 된다는 것 고로 철학적 업적에 있어선 플라톤, [[칸트]] 등이 많이 거론되나,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가장 모범이 되는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가 많이 꼽히는 편이다. 또한, 사상 최강의 토론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사람이기도 하나, 그 기록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저작에서 비롯된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포함한 14:1의 토론에서도 무쌍을 펼치나,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정의는 《대화편》이고, 이건 철학과 문학의 중간 형태라고 보면 된다. 초기 《대화편》이 내용상으로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잘 표현해주었을 수도 있으나, 이 안의 묘사는 어느 정도 문학으로 파악해야지 곧이곧대로 역사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물론 이건 당대 사람들이 읽으라고 쓴 글이며, 토론의 무간지옥인 고대 아테네 전성기에서 ~~아가리 파이터~~논객(論客)으로 유명했던 소크라테스가 토론에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 정도는 사실일 것이나, 그의 전적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다 하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에 속한다. 그리고 사실 멍청한 척하면서 산파술을 펼치는 모습은 주로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고, [[크세노폰]]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는 평범한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사리 분별이 지극히 뚜렷하고 양식이 있으며 사나이다운 모습이다. 뭐가 진실인가는 요즘도 학자들의 연구주제이긴 하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사람에 따라 태도를 달리 했다고 하니, 아마 그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표리부동하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상대방의 성격이나 지적수준 등에 맞춰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먹고 도움이 되는 식으로 대화를 전개했다고 한다.[* 아마 소크라테스는 이상주의자이고 생각이 많은 플라톤 앞에서는 산파술을 많이 펼쳐 보였고, 페르시아 원정을 다녀올 정도로 평생 군인의 삶을 산 크세노폰 앞에서는 양식 있고 남자다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비슷한 예로 공자도 제자들 성향에 따라 같은 가르침이라도 다르게 설명하곤 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플라톤]]은 그리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을 또 감명 깊게 받은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고대 그리스 역사의 위인인 [[알렉산드로스 3세]]이니, 따지고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증손제자에 해당된다. 허나 정작 알렉산드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받은 영향이라고는 일리아스와 귀납적 추론 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를 죽인 것은 물론이고 다시 태어나면 [[디오게네스]]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물욕 뿐만 아니라 식욕과 성욕까지 자제하는 성격을 가졌다. 이러한 실천은 오히려 디오게네스의 철학과 닿아 있다.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드로스의 관계는 정치적 파트너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당장 알렉산드로스가 주장했던 세계시민주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이며 이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많이 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