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크라테스 (문단 편집) == 공적인 삶 == 우선 소크라테스의 삶은 가난했다.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철학자의 삶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구박을 많이 받았고, 이 때문에 상술했듯 티격태격 싸우는게 일상다반사가 된 것.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하루는 제자들 중 한 명이 "스승님, 결혼은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명언|"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드는 의문이, 이렇게 가난했던 소크라테스가 일개 수병도 아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은 돼야 군장(軍裝)을 마련할 수 있었던 중장보병으로 어떻게 참전할 수 있었느냐다.[* 고대와 중세에서, 고급 무장(武裝), 즉 전투 장비는 병사나 기사 개인이 장만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재력이 충분한 주군에게 고용된 기사라면 예외가 될 수도 있겠지만, 중장보병의 군장(軍裝)은, 오늘날의 물가로 계산해서 어지간한 고급 중형차 한 대 값이라고 보면 되고, 기병(騎兵)용 말과 고급 장비는,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웬만한 집 한 채 값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아테네도 처음엔 민주정이 귀족과 자산가들 위주로 이루어졌다. 아테네에서 빈민층은 값 비싼 장비가 필요 없는 해군 노잡이로 참전했는데, 아테네가 성장하고 세력이 확장되면서 해군의 규모와 중요성이 높아져서, 이 노잡이들도 국방에 기여한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참정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무지막지한 인력 동원을 자랑했던 로마는, 순수히 자비로 장비를 마련하던 시절에는 그 많은 인력 동원을 위해 흉부를 대충 보호하는 금속판만 줄에 묶어 장비한 무장을 썼었다. 마니퓰라 제도 하에서 최전선을 담당한 비숙련병인 하스타티가 대표적인 예시.] 이에 역사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석공소 주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재개발 사업으로 단단히 한몫 잡았을 거라는 설, 소크라테스 대신 석공소를 운영했던 크산티페가 의외로 수완이 탁월한 경영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설,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유한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 대신 군장을 마련해 드렸을 것이라는 설 등. 아니면 그냥 대대로 군장을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아테네를 지극히 사랑했던 [[철학자]]로서, [[소피스트]]들의 궤변에 아테네가 놀아나고 상대주의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이에 반발하여 보편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며 등장했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지극히 기이한 인물로, 하는 일도 없이 시장이나 광장을 돌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묘한 철학적 질문을 해댄 것으로 유명하다.[* 광장에 소크라테스가 뜨면 다들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공적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피력하는 것이 높이 평가되었으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공적인 모임에도 그다지 참여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에서는, 그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다이몬이 금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내가 바삐 돌아다니면서 사사로이 그렇게 충고를 하면서 부질없는 참견을 하지만, 공적인 모임에 나타나서 나라에 대해서는 충고를 하지 않는 것을 아마 이상하게 생각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이미 여러분이 여러 번 여기저기서 내가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은 적이 있는 바로 그것, 즉 나에게 자주 나타나는 일종의 신의 알림이라든가, 신령스런 것인데…(중략)… 바로 그것이 내가 정치에 관여하기를 반대하고 있거니와, 그 반대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왜나 하면 아테나이의 여러분, 내가 일찍이 어지러운 정치에 관여하려고 했더라면 틀림없이 벌써 몸을 망치고, 여러분이나 나 자신에게나 아무 이로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올재 번역본 중] 좀 더 와 닿게 설명하자면, 돈도 안 벌어오면서 딱히 정치적인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아다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가 비록 공적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도,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이 현대인들보다 대단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개중에서도 아테네와 같이 가장 번성하고 개방적인 도시국가는, 외국인이나 시민권을 얻지 못한 채 오래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시민권자들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민권자들이 시장바닥이나 광장에서 국가정책이나 도덕에 대해 토의를 하는 것은 현대보다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현대로 치면 명사나 학자들이 TV나 유튜브 교양 방송에 나와서 토의하는 것과 같은 역할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