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크라테스 (문단 편집) == 소크라테스의 재판 ==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고발되어서 재판에 선 끝에 패소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소크라테스의 재판에 대해서 당대에 자세히 서술한 자료는 2개가 있는데, 하나는 잘 알려진 [[플라톤]]의 대화편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변론]]"이고, 또 하나는 또 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의 "회상"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중에서 철학적으로 성과가 가장 으뜸인 제자로 알려져 있다. 반면에 크세노폰은 철학적 재능은 그보다 훨씬 못하지만, 당대에 유명한 군인이면서 외교, 정치 감각도 탁월했던 인물이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적인 면을 잘 조명한다면, 크세노폰은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아테네 민중이 어떻게 소크라테스를 바라봤는지에 관한 단서를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다만 플라톤과 크세노폰 둘 다 한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두사람 모두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임종을 직접본적이 없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아프다는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고, 크세노폰은 용병단의 군인으로써 페르시아 영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시말해 둘다 다른 제자들에게서 전해들은 것에 의존한 2차자료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이외에 남은 자료가 없기 때문에 현재로는 어쩔 수 없다. 한편 철학자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이라는 두 자료의 차이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원인을 놓고 크게 2가지 해석이 존재해 왔다. 1. 플라톤적 견해 : 소크라테스는 미신과 무지, 감정에 휘둘리는 민중의 뜻에 거슬렸다는 '불경죄'를 이유로 그 [[중우정치]]에 의해 희생되었다. 2. 크세노폰적 견해 : 소크라테스는 그 주변의 정치적 인물들 때문에 희생되었다. 플라톤의 견해는 계몽시대 이전에, 크세노폰의 견해는 계몽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통설을 이루었다. 크세노폰의 정치적 원인설이 인기있었던 이유는 계몽시대 서양인들이 고대 그리스를 종교적 미신에서 자유로워서 서양의 합리주의의 토대를 이루었다는 견해가 주류였기 때문이다[* Trapp, 2007]. 그 시발은 철학사가 브루커(J.J.Brucker)의 크세노폰에 대한 견해가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 반영되면서 였다는 의견[* Homer H. Dubs, 1997]이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당대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 >소크라테스에 대한 공식 고발내용 > >1. 아테네가 믿는 신을 믿지 않[* 그리스인이 이성적이라는 현대의 인식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 공공연하게 신이 없다거나 혹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은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한 예로 "태양은 신이 아니라 그저 타오르는 불덩어리일 뿐이다."라고 말한 철학자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신을 모독하는 자라고 분노를 사서 추방당했다.]았으며 > >2.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 시켰다. > >---- > >-고발인 시인 멜제토스, 민중파 영수 아뉘토스, 정치가 뤼콘- > > >소크라테스가 생각한 비공식 고발내용(당대 악소문) > >1. 하늘에 높이 있는 것들을 골똘히 생각하는 자이며 지하의 온갖 것들을 탐사하는 자(=[[자연철학]]자) > >2. 한결 약한 주장을 더 강한 주장으로 만드는자(=[[소피스트]]) > ----- ><플라톤, 변론> > 소크라테스는 >1.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nomizein) 않고, >2. 새로운 신격(다이몬daimon)을 수입한 죄를 짓고 있다. 또, >3.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도 짓고 있다. > ----- ><크세노폰, 회상> 내용은 보다시피 거의 같지만, 플라톤과 비교해서 크세노폰에게서는 자연철학자와 소피스트라고 비난받은 점에 대해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여기서 들어나는 것은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자연철학자와 소피스트들과 학문적 입장이 달랐다는 것을 매우 중시하는데 반해, 정치가였던 크세노폰은 정치적 상황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정치를 중시하는 크세노폰의 성향 때문에 그의 글에는 플라톤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정치관련 고발 내용이 풍부하게 들어가 있다. * 소크라테스가 직접 신탁을 내리는 듯한 행위를 해서 아테네에서 널리 화자되고 있었다고 크세노폰은 증언한다. >"신령스런 존재(daimonion[* 영단어에서는 악마를 뜻하지만, 그리스에서는 하급신을 뜻한다.])가 자신에게 신탁을 내린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특히 바로 이걸 근거로 그들은 새로운 신령스런 존재들을 끌어들인다고 고발[*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도 검증되는 내용이다.]했던 것 같다. 위 발언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신앙심이 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크세노폰은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신의 권위를 존중하며 행위했기 때문에 기성 아테네의 종교활동과 다를바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 아테네가 공직자를 검은콩 중에서 흰콩을 뽑는 추첨방식으로 결정해온 것에 대해서 소크라테스가 비판을하여 그의 제자들이 아테네의 국법을 멸시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압제자들이 나왔다고 고발자들이 주장한 사실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함께하는 자들이 현행법을 깔보게 만들었으니, 키잡이든, 목수든, 피리 연주자든 잘못하게 되더라도 나랏일을 잘못할 때보다는 훨씬 가벼운 해를 끼치게 되는 경우에는 추첨된 사람을 쓰기를 원하는 자가 없거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추첨으로 임명하는 것은 얼빠진 짓이라고 말을 하였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당대에는 이러한 공직 추첨제의 당위성을 신의 계시에서 찾았기 때문에 신앙심과 관련해서도 문제가 되었다. 크세노폰은 이 문제에 관해서 자신의 책 상당 부분을 할애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어떤식으로 당대 신앙을 존중했는지에 관해서 많은 에피소드를 제시한다. *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에 끼친 끔찍한 해악에 대해서도 고발자들이 문제 삼은 사실을 말한다. >"크리티아스와 [[알키비아데스]] 두사람은 나라에 너무도 많은 나쁜짓을 했습니다. 크리티아스는 과두정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탐욕스럽고 폭력적이며 살육을 일삼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면, 알키비아데스는 민주정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무절제하고 오만한 사람이 되었으니까요."라고 고발자(=폴뤼크라테스[*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장에 이와 같은 정치적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는 것은 수사학자 이소크라테스의 <부시리스>를 통해서 검증이 된다.])가 말했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내용이다. 그 집안이 유력한 귀족가문으로써 과두파의 핵심이었으며, 저 폭군 크리티아스가 다름 아닌 자신의 5촌 친척이었던 플라톤으로서는 자신의 가문이 자신이 사랑한 스승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과두파와 가깝지 않았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사상적으로도 과두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과두파 집권기에 비판의 날을 세웠다가 정권으로부터 일체의 발언을 금지당하는 처분까지 당했다며 스승을 변론하는데에 장문을 할애했다. *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에게 부친을 바보로 알도록 만들었으며, 사람이 병들거나 소송에 휘말리면 근친들이 나서는 전통 또한 무가치하다고 말한 과거도 문제 되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버지들을 짓밟으라고 가르쳤는데,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들보다 지혜롭게 만든다고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이상의 판결을 받아내면 자기 아버지라도 구속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된다고 공언함으로써 였으니, 이는 '더 무지한 자는 더 지혜로운 자에 의해 구속되는 것이 적법하다.'는 법조항을 근거로 했습니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이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서도 소크라테스가 위 법률조항을 사용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친척들에게까지 망신을 주게 만들었으니, 이는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은 친척들이 아니라 의사와 변론할 줄 아는 사람들이 도움을 준다고 말함으로써였습니다."라고 고발자는 말했다. >한편 친구들과 관련해서도 이로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고 있지 못하다면 친구들이 호의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이로움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고발자는 말했다. 또한 그분은 필요한 것들을 알고 있고 설명해 줄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존경의 가치가 있다고 공언했다고 고발자는 말했다. * 소크라테스가 유명한 시인의 시구를 골라서 비틀어서 오독하는 기술로 제자들에게 부도덕한 내용을 가르친다는 오해를 받았다고 말한다. >고발자는 그분이 명성이 드높은 시인들에게서 아주 몹쓸 구절들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폭정(tyrannikos)을 일삼으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헤시오도스의 "일은 전혀 비난거리가 아니고, 게으름이 비난거리이다."를 인용해서는 부정의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멀리하지 말고 그것들도 이익을 고려해서 행하라는 뜻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발자는 호로메스의 말을 소크라테스가 자주 했다고 말했다. "백성들 가운데 소리치는 자가 보이고 눈에 띄면, 그는 지휘봉으로 떄리고 말로 꾸짖었다."의 뜻을 그 시인이 일반백성들과 가난한 자들을 떄리는 것을 칭찬했다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즉 크세노폰을 정리하면 고발내용은 다시 4가지로 풀어낼 수 있다. 1. 아테네의 종교적 권위를 무시했다. 1. 아테네의 가부장적 권위/전통을 무시했다. 1. 아테네의 민주주의 관직 제도를 무시했다. 1. 아테네에 폭군들을 키워냈다. 1번과 2번의 경우, 일반 아테네 대중의 반감을 산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아테네는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아테네인들의 유수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만큼 막연하게 그들이 이성적이고, 비종교적이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사소한 가정문제에서 부터 중요한 군사결정까지 점을 쳐서 결정할 때가 많았고, 그러한 점치는 행위에는 신이 관여한다는 종교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의 생각에 제비뽑기 선발제도를 무시하는 것은 ... 모욕이었다. 그들은 제비뽑기 기계 클레로테리온의 구멍으로 흰색과 검은색 패를 인도하는 것은 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대 그리스에서는 신의 승낙 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클레로테리온은 단순한 제비뽑기 기계가 아니라 효험 있는 주사위 점이었다. 절대로 비웃어서는 안 될 신성하고 신비로운 절차였다. >---- >-Bettany Hughes, 《아테네의 변명》{{{-2 ''The Hemlock Cup''}}}, 강경이 번역, 옥당, 2012, p.499 더군다나 아테네에서 데모크라티아는 근대국가의 세속헌법적 의미가 아닌, 그 자체로 신격을 지닌 신으로 대우 받았다. 그리고 선거를 민주정치의 한 형테로 인정하는 근대인의 생각과 정반대로, 아테네인에게 선거란 본질적으로 비민주적인 행위였다.[* 비록 아테네가 장군을 선거로 뽑긴 했지만, 이것은 '현실'을 위한 타협이었지 그 자체로 아테네에서 민주정치 요소로 인식된 건 아니다.] 이런 환경에서 직접민주정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행보는 데모크라티아라는 신(神)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아테네에서 '추첨'은 신의 질서가 개입하는 종교적 행위였다는 것도 중요하다. 곧 '추첨'은 본질적으로 제비를 뽑아 점을 치는 행위였고, 바로 그 '점 치기'를 소크라테스가 비판한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신들과 다이몬들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것을 믿고, 신탁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경건하고 신심 깊은 아테네인이었다.] 한편 아테네의 가정은 각각 하나의 나라이고, 가부장이 그 나라의 임금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가부장적 권위는 크게 존중 받았다. 그러한 가부장들이 곧 아테네의 시민으로 여겨졌던 만큼 가부장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를 공격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동시대의 뛰어난 비판적 지성 중의 하나이던 [[아리스토파네스]]가 소크라테스를 증오했던 것도 1번, 2번 항목 때문이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소크라테스 풍자는 정당한가? ―그의 『구름』에서의 소크라테스 혹평에 대한 반론. 윤병렬, 철학탐구, 2012, vol.32, pp. 115-145.] 3번과 4번은 당대의 정치적인 문제와 깊게 연관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 위험인물들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인물은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 [[플라톤]]의 친척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대화형식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크리티아스》라는 저술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전설 속 대륙 [[아틀란티스]]도 바로 이 《크리티아스》에 등장한다.]이다.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양쪽을 모두 몇 차례씩 배신한 희대의 배신자이자 기회주의자였다. 한편 크리티아스는 적의 앞잡이가 되어서 폭정을 했던 [[이완용]] 같은 인물이었다. 플라톤과 비교해서 크세노폰에만 왜 정치적인 고발내용이 이렇게 풍부하게 들어가있는지 의문이 학계에서는 제기되어 왔다. 도리옹을 비롯한 콜라이아코와 같은 학자들은 크세노폰만이 언급하는 고발내용은 플라톤이 언급하는 세명의 고발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 와 관련하여 학자들은 기원전 403년에 내려졌던 '사면령'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재판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장기간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그 황금기가 막을 내린 시점이었다. 아테네에는 잘 교육받은 귀족 엘리트를 중심으로하는 과두파와 도시의 일반 시민들을 대변하는 민중파가 존재했는데, 스파르타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스파르타는 과두파가 정권을 잡을것을 아테네에 요구했다.그 결과 크리티아스를 중심으로 30인이 권력을 독점했는데, 이들은 매우 끔찍한 폭정을 아테네에서 휘두른다. 참정권을 가진 시민 숫자를 3,000명으로 제한을 하는 한편 민중파와 온건-과두파를 대대적으로 학살했고, 그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몰수했다. 당연히 이들의 폭정은 시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년만에 민중파가 들고 일어나서 내전이 발생한다. 민중파에 의해 민주정이 회복되었을 때, 민주정은 이전의 과두파에게 "다시는 과거사를 들추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서 통합을 시도한다. >누구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과거 일을 캐서는 안된다. >... >그리고 과거사를 들추었을 때 그를 재판 없이 처형하도록 의원들을 설득하였다. >아리스텔레스, <아테네 정치제도사> 39-40장 학자 콜라이아코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공식 고발장의 내용이 크세노폰과 달리 구체적이지 않은 이유를 이와 같은 사면령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위함이라고 본다. 다시말해 사면령 때문에 소크라테스에게 '''배신자 알키비아데스와 폭군 크리티아스라는 위험인물을 키웠다'''는 혐의를 적용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회적으로 불경죄의 죄목들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알키비아데스]], 크리티아스와 한통속으로 묶어서 처벌하는 것은 아테네인들에게도 꺼려지는 일이었던 것 같다. 성욕과 과시욕에 휘둘려서 살았던 알키비아데스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누가보아도 매우 절제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최소한의 재산을 가지고 아주 자족적으로 사는 것을 보았고, 그분이 모든 쾌락을 아주 잘 지배하며 자신의 말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다루는 것을 보았다. >크세노폰, <회상> 한편 크리티아스와 소크라테스를 엮기는 더더욱 힘들었는데, 소크라테스가 공공연히 비판하면서 30인 정권의 심기를 거슬렸기 때문이다. >30인 정권이 많은 시민들을 죽이고, 불의를 행하도록 조장했을 때, 어디선가 소크라테스는 소 떼의 목자가 되어서 소들의 수를 줄이고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면서 자신이 나쁜 소치기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다면 그는 이상한 사람이며,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시민들의 수를 줄이고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자신이 나쁜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더욱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크세노폰, <회상>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강의하고 젊은이들에게 말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는 처분을 당한다. >30인의 입법가가 되었을 때도 소크라테스에 앙심을 품고 말에 대한 기술을 가르치면 안된다고 법으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선고된 것 중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해도 되는지 크리티아스에게 묻는다. 좋다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몇가지 그 다운 질문을 한다. >몇 살까지 젊은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를 정해주시오. > >30세보다 젊은 장사꾼에게 가격을 묻는 것을 되오? > >누가 어디에 사는지 묻는 것은 되오? > >크세노폰, <회상> 또한 소크라테스는 일종의 [[시민 불복종 운동]]을 행하기도 했다. >시민들 주 어떤 사람(살라미스의 레온)을 끌고 와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법에 어긋나게 명령을 한다는 이유로 말을 듣지 않았다[* 플라톤 대화편에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 재판은 우선 투표([[배심제]])로 유죄/무죄를 가린 후, 유죄로 결정되면 다시 고발자가 제안하는 처벌과 피고 본인이 제안하는 처벌 중에서 투표를 하여 채택하는 방식이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특정 당파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변론하며, 최종적으로 281:220, 61표차로 유죄가 결정됐다. 표차가 생각보다 안 났다는 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먹혔다는 걸 의미했기에, 이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사형]] 판결을 받을 확률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고무된 소크라테스가-- 다시 특유의 [[어그로]]를 시전하며-- 자신은 무죄라며 사형은커녕 오히려 '''국가유공자급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장황하게 말한 후, 마지막에 "하지만 다른 사람이 벌금형을 제안하라고 권했으니 그렇게 하겠다" 라고 배심원들의 심기를 자극하는 악수(惡手)를 두고 만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에 대해 아테네 사람들이 숙고하도록 만드는 철학적 행위야말로 어떤 행위보다도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고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가르친 공로가 있는 자신은 국가에 엄청난 봉사를 한 것이므로, '영빈관에서 나한테 밥이라도 한 끼 사야 되는 거 아니냐' 라는 식으로 어그로를 끌었던 것. 참고로 아테네 시민이 영빈관에서 대접받으려면, 개선장군이나 올림픽 경기 우승자급 위업을 이룩해야 했다.] 쉽게 말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피 본 사람들이, 그래도 소크라테스까지 죄를 묻는 건 옳지 않은 거 아닌가, 라며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그렇게 실드 쳐주는 사람들 심기까지 건드리는 ‘나의 위대함을 알라’ 식으로 발언한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 자기변호 이후 361:14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을 받고 만다. 말하자면 무죄 쪽에 표를 던졌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를 들은 후에는 사형 쪽에 표를 던지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도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법정에서도, (듣는 내가) 기분 나쁘다, 좋다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이 자신에게 사형판결을 내리게 만듦으로써, 그들이 알고 있고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정의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자신의 죽음으로써 증명한 셈이라는 것이다. 물론 배심원들을 저주했다는 말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