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피스트 (문단 편집) == 사상 == 소피스트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프로타고라스]]이고, 회의론에서는 [[고르기아스]]를 가장 대표적 인물로 꼽는다.[* 다만 고르기아스가 소피스트로 분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자신을 '''"수사가"'''라는 뜻의 레토르(Rhetor)라고 불렀으며, 소피스트들이 총출동한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짓거리는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관례적으로 고르기아스 또한 소피스트의 일종으로 친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에 따르면, 만물에 대한 인식은 감각에서 비롯되는데, 사람마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감각이 상대적이니 진리 또한 사람마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그는 아테네 민주정을 정당화하는 최고의 이론가로 대접받곤 하였다. 반면에 고르기아스는 그의 《비존재에 관하여》라는 저술의 세 가지 논변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먼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is던가 is not이던가 할 것이다. There is an apple이거나 There isn't an apple이거나 할 것이다. apple이 아니라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being을 집어넣어 본다. There is not being이 가능하다고 가정한다. 한국말로 거칠게 옮겨버리면 거기에는 being(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것은 There is not being이라는, being이(존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it is being의 경우, 고르기아스는 [[엘레아의 제논|제논]]과 [[멜리소스]]의 주장을 예시로 들면서, it is being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멜리소스의 주장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단편선이라는 책에 다 기재되어 있다. 혹은 이 위키의 멜리소스 링크로 들어갈 경우 그 문서에 링크된 영어 위키피디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다음 '''비록 존재한다고 쳐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That is something. 이렇게 주장할 경우 That은 something이 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something에 아무 거나 넣어도 가능하다. That is white라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That is a rose라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That is white rose도, 딱히 말로서는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white rose라는 것은 없다. He is flying with wings! 불가능하다. 소피스트들의 주의주장에 따르면 언어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거나, 현실과 연결되어야 의미가 있다. That is something에서, 우리가 is에 연결되는 그것을 안다,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That is white rose는 언어의 기준으로 볼 때 틀리지 않았다. He is flying with wings! 역시 언어의 기준으로는 가능하다. 이렇게 is에 아무 거나 갖다붙여도 가능하다는 것은, 우리의 앎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비록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알 수 있다고 쳐도 우리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다'''[* 어떤 것이 있고, 알 수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말에 의해서 생각을 전달한다. 생각을 말로 완전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씨가 a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씨는 a를 모른다고 할 때, 김씨가 이씨에게 말로 a를 전달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격이다. 이씨가 a라는 것을 희미하게라도 알고 있지 않다면.]라는 회의론을 펼쳤다. 진행되는 논증이 앞 논증을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부분 부정하며 나아가는 기묘한 논법을 펼치고 있는데,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주장을 '''논할 것도 없다'''며 깠다. 그도 그럴 것이 고르기아스의 저 논증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이기 때문이다. 만일 저 논증을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실재)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is.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아무것도 없다, 즉 is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 is가 있다는 얘기가 아니냐는 것이다. 즉 There is 아무 것도 없다는 그것.] 존재해도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알 수 있어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물론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무시무시한 주장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논변은 실재론 또는 존재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두 번째 논변은 인식론의 가능성을, 마지막 논변은 해석학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사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를 비롯한 엘레아 학파의 주장을 대놓고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파르메니데스의 명제, 특히 그의 존재자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해석은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그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고르기아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순수사유 대상인 진정한 '''존재 그 자체'''가 없거나, 있어도 알 수 없거나,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그의 다른 저술인 《헬레네 찬사》에서처럼 그가 자기 자신의 주장에 대해 '''"아님 말고~"'''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만, 고르기아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실리가 걸리지 않은 이깟 논변이야 맞아도 그만 틀려도 그만이었을 수 있다. 물론 무용한 것에 목숨 걸고 달려드는 철학자들이야 그게 문제라고 지적하겠지만...] 이 둘의 주장을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것이 진리이다"'''라고 주장한 반면, 고르기아스는 '''"참된 로고스(논리)와 거짓된 로고스(논리)는 구별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대비를 뚜렷이 하기 위해 고르기아스가 모든 것이 거짓이다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의 저 유명한 비존재에 관하여에서 관측할 수 있는 고르기아스의 입장은, 언어는 실재와 정확히 대응되어야 한다는 관점이 아닐까 한다. 그와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고르기아스가 논증을 전개하고 있는데, 만약 고르기아스가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만 주장했다고 단정해 버릴 경우, 그는 굳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해도 알 수가 없다거나, 알아도 전달할 수가 없다거나와 같은 주장을 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 이 모든 가정들은 참이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성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사 내에서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소피스트이란 무가치한 사이비이거나 끽해야 정반합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라는 합을 등장시키기 위한 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많은 연구 끝에 소피스트들 역시 '''철학자들'''이라고 보는 견해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소피스트들의 견해 중 많은 부분이 현대철학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거나, 그런 면모를 보이지 않는 소피스트들도 깊게 연구해 보니 상당히 철학적인 견해나 논거를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당시에 철학자라는 명칭은 '''"(지혜를 갖지 못해)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를 '''이미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보았던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철학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철학자로 보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들, 그들의 주장이 갖는 철학적 의미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의 본질은 실천적 활용에 있다고 보았다. 앎은 써먹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탐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실천적인 지식과는 별도로 그 자체를 위한 지식을 상정하여 거기에 더 높은 우위를 부여하는 전통 형이상학보다도 근대 이후의 사상에 더 근접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식론에 있어서 소피스트들은 지식은 감각이며, 그것은 그 순간만큼은 그 자체로 참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감각하는 사람이 누구이냐에 따라 감각된 내용, 즉 지식은 상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진리와 지식, 도덕이 상대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그들은 시대나 문화권에 따라 진리에 대한 지식은 바뀔 수 있으며, 도덕률에도 어떠한 절대적 기준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그렇다고 지식이나 도덕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은 아니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하여 사람들이 정한 규약으로서의 지식과 도덕은 긍정하였다. 절대적인 도덕이 있다기보다, 어떤 한 사회 A에서 어떤 행위 a가 도덕적이라고 여겨진다면 도덕적이고 부끄럽지 않은 것이고, 어떤 한 사회 B에서 어떤 행위 a가 비도덕적이면 비도덕적이고 부끄러운 것이고 이는 준수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정치철학적으로 대다수의 소피스트들은 민주정을 최선의 정치적 대안으로 옹호하였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프로타고라스를 필두로 다수의 소피스트들은 아테네가 민주정 사회였기 때문에 부상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민주정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고르기아스나 트라시마코스는 [[참주정]]을 주장했다. 아니, 애당초 그들의 학생들부터가 [[참주]]가 되고 싶어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반면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 각각의 저작에서 여러 가지 견해를 표출하였다.[* 정치철학적인 면모가 보이는 3저작인 국가, 정치가, 법률 각 저작마다 플라톤의 입장은 핵심 이론은 동일해도 어떤 정치체제가 가장 좋고 나쁜가 하는 세부 사항 등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정치철학, 법철학적으로는 노모스(Nomos)와 피시스(Physis)의 대립도 소피스트들의 주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대충 말하자면 노모스는 사람 손을 탄 것들이다. 법률, 규범, 관습, 규칙 등등. 피시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어의 physics 같은 것을 생각해도 좋다. 소피스트들은 많은 경우 노모스처럼 사람 손 때 탄 규범들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인 피시스를 억제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고, 자유롭지 못하며, 또 그렇게 사람들의 이익을 제한하는 까닭이다.[* 이런 주장은 훗날 니체에 의해 발굴되는, 소시민의 도덕과 영웅의 도덕이 충돌하는 논설로도 표현된다.] 허약한 소시민들이 자기들의 비루한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수의 힘으로, 강하고 비범하기에 더 많은 이득을 자연스럽게 누려야 할 인물에게 소시민적인 노모스를 강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연은 강한 자들에게 많은 것을 허락한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고, 자연의 명령은 많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있으니. 그러므로 노모스에 의해서 강제된 부정의를 당하는 것은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이고, 차라리 자기가 부정의를 저질러버리는 것이 덜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는 더 나아가, 부정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에게 바람직하고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으로도 이어진다. 정의는 남을 돕는 것이고 부정의는 자신을 돕는 것인데 행복은 자신을 돕는 것에 있으니 말이다. 어떤 소피스트들은 노모스를 옹호하기도 했다. 왜냐면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럿이 모여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회가 있어야 되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규칙이나 정의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사람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하회의 교육 덕택이니까 사회의 규칙도 함께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은 신에게서 받은 신성한 것이요, 지혜롭고 경험 많은 이들의 산물이요, 선을 추구하고 악을 몰아내는 사회의 약속인 까닭이다. 이런 노모스와 피시스의 논쟁은 그리스 사회가 격변기를 맞아 낡은 관습과 법률이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사상에 걸맞지 않은 듯이 보여 더 좋은 것으로 개변하려는 움직임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인간의 적절한 삶을 물었고, 그 적절한 삶이란 이른바 훌륭함들, 능숙함들, 덕스러움들로 표현해 볼 만한 여러 멋지고 아름다운 가치들의 실현 속에 있고, 그 여러 멋지고 아름다운 가치들의 총합을 소위 덕으로 번역되는 arete라는, 단수형의 실현으로 생각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arete라는, 우리 말로는 흔히 덕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뭐냐고 물으면 반대로 풀어나갈 수 있다. 여러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나 사상의 공통점 혹은 꿰뚫어낸 것이 arete가 되고, 이 arete의 실현은 곧 여러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한 것들의 실현이기에 좋은 삶,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 이처럼 소피스트들은 단순한 궤변론자라기 보다는 전반적으로 회의론적 성향이 강한 인간중심적 철학자들이었으며, 심지어 현대의 해체주의적 성향과도 유사한 흐름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이 그들 스스로의 주장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고, 후대의 철학사가들이 그들의 주장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들은 철학적 탐구를 하기 싫어했거나 하지 않았다고는 못하지만, 철학이나 연구보다는 변호사 노릇을 하거나 강연에 나가서 돈을 버는 것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현대의 평가들 중 어떤 부분은 그들에 대해 전통적으로 지나친 저평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으로 고평가되는 부분이 있다. 이들이 궤변론가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소피스트들은 뭐 학파로 묶인 것도 아니고 공통적인 스승을 [[사사]]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각각이지만, 그들에게 있어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이중 논변이다. 이것은 소피스트들의 특기인, 이른바 같은 사안을 다룸에 있어서 어느 때는 찬성의 입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어느 때는 반대의 입장에서 승리를 거두는 수사학 훈련이다. 이들은 법정에서의 승리를 위해 이와 같은 말솜씨를 전문적으로 훈련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소피스트들은 [[신]]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대표적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크리티아스는 신은 똑똑한 인간이 발명한 것으로, 인간을 규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들도 필요에 따라서 신화를 차용하기도 하고 당시 아테네에서 숭배받던 그리스 신의 이름을 들먹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한들 그들이 신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편의를 위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았으며, 이는 그들이 불경죄로 고소당하여 추방당하는 근거가 되었다.[* 물론 이는 소피스트들에게만 해당하는 점이 아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소피스트와는 별개의 인물로 취급되었던 아낙사고라스는 소피스트들 이상으로 노골적으로 유몰론적 세계관을 주장하였으며, 결국 불경죄로 고소당하여 추방당한 전례가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도 알키비아데스를 멕여버린 필살기가 바로 불경죄였고 알키비아데스는 이를 두려워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